영화 비평

거장의 야심, 그리고 빠진 한 가지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 리들리 스콧 · 2012

거장의 귀환

리들리 스콧이 33년 만에 「에이리언」(1979) 세계관으로 돌아왔다. 「프로메테우스」(2012)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었다. 한 거장이 자기가 만든 SF 고전을 33년의 침묵 끝에 다시 열기로 한 결정. 그 결정의 무게는 영화 산업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야심도 있었다. 「에이리언」이 생체 공포의 전형이었다면, 「프로메테우스」는 그보다 큰 질문을 들고 왔다. 인류는 누가 만들었는가. LV-223 행성, ‘엔지니어’라 명명된 외계 종족, 검은 절멸 액체. 이것은 한 편의 우주 스릴러가 아니라 한 편의 우주 신학(神學)에 가까웠다.

그러나 빠진 한 가지

그러나 거장의 영화일수록 빠진 자리가 더 도드라진다. 「에이리언」이 33년 전에 가졌던 결정적인 한 방 — 한국 관객들이 흔히 “그 영화 보고 한동안 잠이 안 왔다”고 말하는 종류의 한 방 — 이 「프로메테우스」에는 없다. 풍자도 옅어졌고, 인간 약자를 향한 거친 인본주의의 분노도 옅어졌다.

「에이리언」은 미래사회 노동자(시고니 위버, 엘렌 리플리)가 자기 회사의 부조리한 명령을 거부하면서 외계인과 싸우는 영화였다. 즉 외계인과의 싸움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한 싸움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자본주의 싸움을 잃었다. 대신 신학을 얻었다. 그것이 더 가치 있는 교환이었는지는 13년이 지난 지금도 평론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데이비드라는 발견

다만 이 영화의 진짜 발견은 안드로이드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벤더)다. 인류가 자기 창조주를 만나러 가는 동안, 데이비드는 자기 창조주인 인류를 거꾸로 관찰한다. 그가 인간에게 “당신들은 왜 나를 만들었느냐”고 묻고, 인간이 “할 수 있어서(because we could)“라 답하는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한 신이다.

이 한 줄에 영화의 모든 답이 있다. 인류는 자기가 만든 것에 대해 그 이상의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계속 만든다. 데이비드는 그것을 깨닫고, 5년 뒤 「에이리언: 커버넌트」(2017)에서 자기 창조주를 멸절하기로 한다. 비합리적인 결정이 아니다. “할 수 있어서 만들었다면, 할 수 있어서 없앨 수도 있다”는, 잔혹할 만큼 일관된 논리다.

한국 영화에 던지는 질문

「프로메테우스」는 결국 한 가지를 묻는 영화다.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돌려줄 때, 우리는 무엇을 답할 것인가.

한국 영화 산업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매년 수십 편의 신작이 만들어지고, 수백 명의 신인 배우가 데뷔하고, 수십 개의 OTT 시리즈가 출범한다. 그러나 만들어진 그것들이 우리에게 “왜 만들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답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서”라는 답이 정직한 답일까, 아니면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답일까.

리들리 스콧은 거장이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그가 던진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거장의 영화에서 빠져 있던 한 가지 — 인본주의의 거친 분노 — 가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