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샐리 루니에게 — 인터메초
「인터메초」 (Intermezzo) · 샐리 루니 (Sally Rooney) · 옮긴이 허진 · 은행나무 · 2024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매번 머뭇거린다. 아마도 ‘좋은’이라는 형용사가 문제일 것이다. 좋다는 것은 완성도를 뜻하는가, 야심을 뜻하는가. 익숙한 쾌락을 주는 소설이 좋은가,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소설이 좋은가. 당신의 네 번째 장편 ‘인터메초’를 읽으며 나는 이 오래된 물음 앞에 다시 섰다.
당신은 세 편의 소설로 한 세대의 친밀성을 정의했다. 연인 사이의 권력, 대화의 긴장, 계급이 스며든 욕망. 그런데 이번엔 연인이 아니라 형제(兄弟)다. 더블린의 변호사 피터와 체스 기사 이반. 열 살 터울의 두 남자가 아버지를 잃고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이야기. 당신은 왜 이 불편한 관계를 골랐을까. 연인은 선택할 수 있지만 형제는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인가. 당신이 다루고 싶었던 건 선택 이전의 유대, 떠날 수 없는 곁의 무게였던 건가.
피터의 문장은 끊어지고 흩어진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침묵이 낀다. 인상주의 회화처럼 윤곽이 흐리다. 반면 이반의 서사는 또렷하다. 체스판 위의 말처럼 한 칸씩 전진한다. 나는 이 비대칭이 형제 사이의 균열(龜裂)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되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두 사람. 애도(哀悼)조차 공유하지 못하는 두 사람.
그러나 나는 솔직해져야겠다. 당신의 이 책은 완벽하지 않다. 실비아의 만성 통증은 서사의 장치처럼 작동하고, 마가렛의 불안은 낡은 소설에서 수입해온 것처럼 어색하다. 어떤 문장은 설명이 과잉이고, 어떤 대목은 에세이스트의 습관이 소설가의 절제를 배반한다. 당신의 날카로운 유리 같던 문체가 이번엔 흐릿하게 김이 서렸다.
하지만 나는 이 흐릿함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당신은 이미 완성된 것을 포기했다. 빛나는 대화, 기민한 관찰, 도시적 세련. 당신을 유명하게 만든 것들을 내려놓고 더 무거운 것을 들었다. 상실, 중독, 부서진 몸. 카리스마 대신 선량함. 재치 대신 성장. 가장 야심적인 소설이 가장 불균등한 소설이 되는 역설. 그것이 ‘인터메초’다.
나는 비평가라는 직업이 때로 부끄럽다. 완성된 것만 칭찬하고, 균열 난 것은 폄하하는 일이 과연 정직한가.
요즘 세상은 형제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연대를 외치고 공동체를 논하지만, 정작 떠날 수 없는 곁은 외면한다. 피도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하지 않은 관계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인터메초’는 그 물음 앞에 우리를 세운다.
어쩌면 좋은 소설이란, 답하지 않고 묻는 소설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