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돋보기 아래의 개미들 — 리틀 라이프
「리틀 라이프」 (A Little Life) · 한야 야나기하라 (Hanya Yanagihara) · 옮긴이 권진아 · 시공사 · 2015
“야나기하라는 높은 곳 어딘가에서 돋보기를 들고 자신의 아름다운 소년들을 개미처럼 태우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비평가 안드레아 롱 추가 『리틀 라이프』를 두고 쓴 문장이다. 퓰리처상 비평 부문을 안긴 바로 그 문장.
한야 야나기하라의 이 소설은 2015년 출간 이래 수백만 독자를 울렸다. 네 명의 청년이 뉴욕에서 삶을 일구는 이야기처럼 시작해, 결국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라는 한 남자의 끝없는 상처로 수렴한다. 수도원에서의 학대, 트럭 운전사들, 의사 트레일러. 폭로는 겹겹이 쌓이고, 독자는 700쪽 넘게 그의 면도날을 지켜본다.
이 책의 쟁점은 고통(苦痛)의 용도다. 존 미쇼는 “회복의 서사를 거부함으로써 거짓 위안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옹호했고, 대니얼 멘델손은 “스트립티즈처럼 폭로를 연출할 뿐 변형은 없다”고 반박했다. 추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이 소설이 연민을 가장한 지배라고, 상처를 입힌 뒤 보살핌을 베풀어 독자의 눈물을 징수(徵收)하는 구조라고 진단한다.
흥미로운 건 주드가 순수 수학을 사랑한다는 설정이다. 등호의 공리—어떤 것은 그 자체와 같다. 신도 부모도 없는 자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차가운 위안. 야나기하라는 그것마저 빼앗는다.
우리 시대는 고통 서사를 탐식한다. 트라우마 폭로는 진정성의 통화가 되었고, 눈물은 감상의 척도가 되었다. 『리틀 라이프』가 폭발적 반응을 얻은 건 그래서다. 동시에 그 성공이 불편한 것도 그래서다. 타인의 상처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건 연대인가, 관음인가.
역설은 이것이다. 이 소설은 고통을 가장 철저히 재현함으로써 고통 재현의 윤리를 가장 날카롭게 묻게 만든다. 비평가들이 이토록 격렬히 싸운 건 야나기하라가 틀려서가 아니라, 그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너무 정확히 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