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정원에서 협상하는 자의 기도 — 야생 붓꽃
「야생 붓꽃」 (The Wild Iris) · 루이즈 글릭 (Louise Glück) · 옮긴이 정은귀 · 시공사 · 1992
1
좋은 시란 무엇인가. 질문을 이렇게 시작하면 답은 언제나 너무 많다. 시인마다 다르고, 한 시인 안에서도 시기마다 다르다. 그러니 질문을 바꾸자. 신을 믿지 않는 시대에, 신에게 말을 거는 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루이즈 글릭의 『야생 붓꽃』(1992)은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퓰리처상을 받았고, 삼십 년이 지났고, 글릭은 3년 전 죽었다. 그런데 이 시집은 여전히 읽힌다. 왜 그런가.
2
구조부터 보자. 이 시집에는 세 종류의 목소리가 있다. 꽃들이 말하고, 정원사가 말하고, 신이 말한다. 꽃 이름을 제목으로 단 시들—야생 붓꽃, 흰 백합, 제비꽃—에서 꽃이 직접 입을 연다. ‘아침기도(Matins)‘라는 제목의 시 일곱 편과 ‘저녁기도(Vespers)‘라는 제목의 시 열 편에서 정원사가 신에게 말을 건다. ‘맑은 아침’이나 ‘여름의 끝’ 같은 날씨와 계절 제목의 시들에서 신이 정원사에게 응답한다. 성무일도(聖務日禱)의 구조다. 버몬트의 정원에서 보낸 일 년이 기도서의 한 해처럼 짜인다.
그런데 이 삼각 구도에서 가장 이상한 건 꽃의 목소리다. 정원사와 신의 대화는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신에게 호소하고, 신이 응답하거나 침묵하는 것. 익숙한 형식이다. 그런데 꽃이 왜 말하는가. 꽃은 인간도 신도 아니다. 그 사이 어딘가, 아래도 위도 아닌 곳에서 말한다. 꽃의 시들은 둘 사이의 이항(二項) 구도를 깨뜨린다. 정원사의 고통과 신의 응답 사이에 제3의 증언자가 끼어든다.
3
시집의 첫 시 「야생 붓꽃」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고통의 끝자락에 / 문이 하나 있었어. / 내 말 좀 끝까지 들어 봐: 그대가 죽음이라 부르는 걸 / 나 기억하고 있다고.” 꽃이 부활을 말한다. 그러나 이 부활은 조건부다.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사실로서 일어난 게 아니다. 페이지 위에서만 일어난다. 시라는 형식 안에서만 가능한 부활이다. 헬렌 벤들러가 정확히 짚었다. “글릭의 흰 백합은, 디킨슨과 허버트의 꽃들과 달리, 곰팡이 삶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페이지 위에서만 일어난다.” 시가 유일한 문이다.
정원사도 경건하지 않다. 기도가 아니라 협상을 한다. 고소하고, 의심하고, 따진다. 신도 위엄이 없다. 조바심 내고, 때로 옹졸하고, 정원사의 무관심에 상처받는다. 꽃도 무구(無垢)하지 않다. 허영과 자기연민에 빠져 있다. 세 목소리 중 누구도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 삼각형의 세 꼭짓점은 각각 제 자리에서 울리고, 서로 부딪치고, 간신히 한 권의 책 안에서 버틴다.
4
스테파니 버트는 글릭을 실비아 플라스와 비교했다. 플라스처럼 심리적 노출의 강도는 극단적이되, 고백시의 느슨함은 거부한다. 1인칭 화자는 실재하지만, 그 1인칭은 아주 얇은 금속으로 잘린 가면이다. 비치는 건 전기(傳記)가 아니라 신경계다. 차이가 있다면, 글릭은 그 신경계 주위에 우주론을 세웠다는 것. 꽃, 정원사, 신—고통을 재분배하고 응답할 수 있는 구조. 버트의 말대로, 플라스가 종교적 상상력 안으로 살아남았다면 썼을 책이다.
메건 오루크는 글릭이 수십 년간 오독되었다고 썼다. 사적 상처를 파는 고백 시인으로. 그러나 글릭의 시는 “우리에게 우리에 대해 말한다.” 『야생 붓꽃』에는 지친 결혼, 상처 입은 아이, 가구를 잃어버린 신앙의 날씨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고백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꽃과 신에게 분배되고, 독자가 받는 건 글릭의 고통이 아니라 자기 고통을 담을 수 있는 구조다. 그래서 이 책은 낡지 않는다. 정원에 무릎 꿇고, 붓꽃 위의 침묵이 무관심인지 주목인지 물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삼십 년 뒤에도 이 책 앞에 멈출 것이다.
나는 정원에 무릎 꿇어본 적이 없다. 화분 하나 제대로 키운 적 없다. 그러니 이 시집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