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허구의 종(種)이 허구를 논하다 —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 유발 노아 하라리 (Yuval Noah Harari) · 옮긴이 전병근 · 김영사 · 2018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표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2018) 표지 © Open Library / 출판사

1.

서문에서 하라리는 펜을 멈춘다. 다음 문장을 쓰면 어느 진영의 독자가 등을 돌릴지 계산하는 장면이다. 그는 이스라엘인이고, 동성애자이며, 명상가이다. 그 자기검열의 고백이 한 쪽 반을 채운다. 그러나 막상 본문에 들어서면 평등은 좋다, 민주주의는 지켜야 한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진술만 정연히 놓여 있다. 어느 영국 서평가는 이것을 디너파티의 안전한 잡담에 비유하며, 차라리 1955년 《데일리 미러》의 ‘로봇 혁명’ 특집이 더 명쾌했다고 적었다. 약속은 두텁고(厚) 알맹이는 얄팍하다는 식의 평이 영어권에서 꽤 만연(蔓延)했다.

2.

그렇다고 책 전체를 무가치하다 일축하는 것은 너무 쉽다. 하라리가 길어 올리는 몇몇 물음은 여전히 불편하게 남는다. 자동화가 단순 노동만 대체하리라는 예전의 믿음은 이제 무너지고 있으며, 알고리즘 자본주의가 ‘쓸모없는 계급’을 양산하리라는 경고는 쉽게 웃어넘길 수 없다. 정보의 규모가 지구적으로 팽창할수록 시민에게 닿을 수 있는 정보는 역설적으로 줄어든다는 관찰도 핑커식 낙관론이 덮어두기 좋아하는 어두운 단면이다. 문제는 이런 진단이 해법의 모호함 앞에서 맥이 풀린다는 것이다. 그가 내놓는 처방 — 지구적 정치, 기본소득, 명상 — 은 사례 연구도 통계도 결여한 채 던져진 선언에 가깝다.

3.

책에서 가장 읽을 만한 대목은 ‘탈진실(脫眞實)‘을 다룬 장일 것이다. 가짜뉴스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는 당대의 패닉에 하라리는 정반대 방향에서 접근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본래 허구를 만들어 그것을 집단적으로 믿음으로써 권력을 조직해 온 ‘탈진실 종’이라는 것이다. 종교, 화폐, 국민국가, 주식회사 — 우리가 의지하는 거의 모든 제도가 공유된 허구 위에 선다. 그렇다면 가짜뉴스는 신종 질환이 아니라, 오래된 만성 질환의 디지털 변주에 가깝다. 이 통찰은 묘한 위안을 준다. 동시에 질문도 돌아온다. 우리가 만들어 낸 허구는 누구를 위해 작동하는가? 하라리는 그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 나서는 일은 독자 몫으로 남겨둔다.

4.

그리하여 이 책은 흥미롭되 불친절하고, 비관적이되 무력한 자리에 머문다. 집단적 위기를 정확히 짚어놓고 그 해법을 개인의 내면으로 후퇴시키는 책을, 우리는 21세기의 정치적 절망을 정치 바깥에서 봉합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도 있다. 어느 서평가는 이 책이 공항 면세점 자기계발 코너에 어울린다고 꼬집었는데, 나는 거기서 『사피엔스』를 처음 집어 든 사람이니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