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정착을 거부한 자들의 별자리 — 방랑자들

「방랑자들」 (Bieguni (Flights)) · 올가 토카르추크 (Olga Tokarczuk) · 옮긴이 최성은 (한국어판), Jennifer Croft (영역본) · 민음사 · 2007

방랑자들 표지
「방랑자들」 (2007) 표지 © Open Library / 출판사

소설이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물이 살아 움직이고, 사건이 원인과 결과로 매끈하게 연결되며,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서사의 원환(圓環)이 완성되는 책.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은 그런 통념에 대한 가장 도발적인 반박이다.

2007년 폴란드에서 출간된 이 소설은 116개의 단편·에세이·일화를 별자리처럼 흩뿌려놓는다. 인물은 등장하자마자 사라지고, 시공은 건너뛰며, 단일한 줄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17세기 해부학자가 자신의 절단된 다리에 평생 편지를 쓰고, 다른 페이지에서는 모스크바 지하철역에서 아이와 남편을 두고 홀연히 사라지는 여인이 스친다.

인과(因果)의 해체, 성좌(星座)의 구축

토카르추크가 시도한 형식은 기차의 직선 운동이 아니라 천체모형의 회전에 가깝다. 사건들은 서로를 일으키지 않는다. 대신 일정한 거리에서 서로를 비추며, 독자의 시선 안에서만 형태를 얻는다. 비평가들은 이 구조를 보르헤스와 칼비노의 계보에 놓되, 토카르추크 고유의 음색—폴란드 동방정교의 분파 ‘도주자들(Bieguni)‘의 신학, 해부학의 역사, 합스부르크 궁정의 박제된 표본—이 더해진다고 본다.

‘도주자들’은 정착이야말로 악마의 함정이며 구원은 끊임없는 이동에 있다고 믿었던 종교 운동이다. 토카르추크는 이 18세기 종파의 신앙을 21세기 공항 라운지 위에 겹쳐놓는다. 끝없이 이동하는 현대인에게 유일하게 남는 정착지(定着地)는 자신의 살이라는 역설. 그래서 이 소설엔 몸을 보존하려는 욕망—플라스티네이션, 성유물, 해부 표본—이 집요하게 되돌아온다.

몸이라는 마지막 영토

화자는 여행을 사랑하는 인물이 아니다. 정착이라는 관념 자체를 의심하는 21세기적 인간이며,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투명해지는 익명성(匿名性) 안에서 해방감을 느낀다. 그가 공항과 열차 사이를 움직일 때, 책 자체도 장르 사이를 움직인다. 소설이었다가 회고록이 되고, 문화인류학 보고서가 되었다가 사유 에세이로 변모한다.

이 산만함은 때로 독자를 지치게 한다. 어떤 일화는 다른 일화보다 평이하고, 농도의 불균질함은 책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이 비대칭성이야말로 진정한 여행기의 본질과 맞닿는다고 변호한다. 매 도시의 인상이 같은 깊이일 수 없듯, 토카르추크는 그 불균등을 형식으로 끌어안았다.

정주(定住)의 시대가 끝났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1인 가구 비율이 증가하는 나라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정착의 문법이 무너지고, 젊은 세대는 월세와 전세 사이를 떠돈다. 정착은 안전을 약속하지 않으며, 이동은 더 이상 불안의 표지가 아니다. 토카르추크의 ‘도주자들’이 18세기 슬라브 숲속에서만 살았던 종파가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머무르지 않는 자들이 구원받는다는 기도문, 그것이 이 시대의 새로운 경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