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선택한 언어로 사라지기 — 내가 있는 곳
「내가 있는 곳」 (Dove mi trovo / Whereabouts) · 줌파 라히리 (Jhumpa Lahiri) · 옮긴이 이승수 · 마음산책 · 2018
강요된 모국어를 버린 작가
퓰리처상 수상 작가 줌파 라히리가 영어를 버렸을 때, 뉴욕타임스는 이를 “문학적 자살”에 비유했다. 2015년 로마로 이주한 그녀는 모국어인 영어와 부모의 언어인 벵골어를 모두 내려놓고 이탈리아어로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 이탈리아어 에세이집 ‘다른 말로’가 나왔을 때 영미 비평계는 당혹했다. 왜 가장 잘 쓰는 언어를 포기하는가.
‘내가 있는 곳’은 그 포기 이후에 탄생한 장편소설이다. 라히리가 직접 이탈리아어로 집필한 뒤, 역시 직접 영어로 옮겼다. 원제 ‘Dove mi trovo’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재귀적 표현이다. 영어 제목 ‘Whereabouts’는 그 자기-소실의 뉘앙스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고 런던 리뷰 오브 북스의 팀 파크스는 지적한다. 번역은 언제나 무언가를 잃는다. 그러나 이 경우, 잃어버리는 주체가 작가 자신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름 없는 도시, 이름 없는 화자
소설의 화자는 사십대 중반의 학자다. 이름이 없다. 그녀가 사는 도시도 이름이 없다. 무엇을 가르치는지, 어떤 책을 쓰는지, 어떤 학회에 참석하는지 작품 속에서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지적 삶의 구체적 흔적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일상의 의례뿐이다. 동네 카페, 미용실, 광장, 수영장. 화자는 그 작은 반복 속에서 만성적 우울을 통제한다.
원문에는 부정의 접두사 ‘s-‘가 쌓인다. 텅 빈을 뜻하는 ‘sgombro’, 길 잃은을 뜻하는 ‘smarrita’, 매달린을 뜻하는 ‘sospesa’. 파크스는 이 음소적 울림이 영어판에서 흩어져 사라진다고 말한다. 라히리의 문장은 두 언어 사이에서 한 번 더 이주한다. 독자는 그 이중의 이주를 감각하기 어렵다.
자유인가, 휘발인가
이 책에 대한 비평적 시선은 양극단으로 갈린다.
뉴욕 리뷰 오브 북스의 시그리드 누네즈는 라히리의 결단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결과물에 대해서는 깐깐하다. 화자가 학자라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지적 삶의 내용이 일관되게 비어 있다는 점이 그녀에게는 미니멀리즘의 미덕이 아니라 어휘의 한계로 읽힌다. 라히리가 아직 다룰 수 있는 이탈리아어의 범위가 좁고, 그 좁음이 인물의 내면 영역까지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4Columns의 에르미온 호비는 더 회의적이다. 라히리의 이전 단편들에서 빛났던 관찰의 압축적 광채 — 빈 우유통 위에 놓인 메모 한 장, 식탁보 위에 떨어진 향신료 한 알 — 가 이번 작품에서는 비물질적 추상으로 대체됐다고 본다. 화자가 “고독은 내 직업이 되었다”라고 선언할 때 그 문장은 한 인간의 결단이라기보다 슬로건처럼 떠다닌다는 것이 호비의 진단이다.
반면 옹호하는 시선도 있다. KGB Bar Lit Magazine은 이 책의 무명성과 익명성을 결함이 아니라 의도된 전략으로 읽는다. 라히리는 평생 ‘인도계 미국인 작가’라는 라벨에 갇혀 있었다. 출신지의 향수와 가족 서사의 압력은 그녀가 한 인터뷰에서 “글 쓰는 식욕 자체를 빼앗아 갔다”고 토로했던 그 무게다. 화자가 이름도 도시도 없이 떠도는 것은 작가가 그 무게를 내려놓기 위한 가장 정직한 방식이라는 해석이다.
제3의 언어, 제3의 자아
라히리에게 이탈리아어는 출생과 가족이 강제한 정체성으로부터의 도주였다. 영어는 미국이 준 언어, 벵골어는 부모가 준 언어. 둘 다 선택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어만이 그녀가 스스로 고른 ‘제3의 언어’였다.
파크스는 이 시도를 영어와 벵골어라는 강요된 이원성을 벗어나 “제3의 자아 공간”을 만들려는 우회로라고 평가한다. 라히리 자신이 표현한 “가장 진정한, 가장 취약한 부분”에 도달하기 위한 길.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언어로 글을 씀으로써 비로소 작가적 권위를 일부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외국 펠로우십을 수락하고 떠난다. 누네즈는 이 결말이 충분히 동기화되지 않았다고 본다. 작가가 화자를 어디론가 보내야 했기 때문에 보낸 것 같은 인상이 남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이 떠남은 줄거리상의 결말이 아니라 작가가 자기 정체성으로부터 다시 한 번 떠나겠다는 선언이다.
언어의 끝에서 묻는다
이 책은 독자에게 쉽게 보상을 주지 않는다. 라히리가 얻은 자유가 독자에게도 같은 무게로 전해지는지는 열린 질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라히리는 안전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퓰리처상 수상작가가 가장 잘 쓰는 언어를 버리고 낯선 언어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문학적 성취를 담보로 건 도박이다. 그 도박의 승패를 지금 판단하기는 이르다.
당신이 만약 이 책을 집어 든다면, 줄거리를 찾지 말기를 권한다. 대신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백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라히리가 새 언어 속에서 아직 도달하지 못한 영역, 그 침묵이 오히려 말하는 것들이 있다. 언어를 바꾼다는 것은 세계를 바꾸는 일이다. 그 바뀐 세계에서 작가는 아직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