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진흙 사태처럼 흘러내리는 문장, 그 아래 묻힌 것 — 태풍의 계절
「태풍의 계절」 (Temporada de huracanes) · 페르난다 멜초르 (Fernanda Melchor) · 옮긴이 엄지영 · 을유문화사 · 2017
“여성을 살해한 남자는 병든 인간이 아니라 가부장제가 정상적으로 빚어낸 산물이다.” 멕시코시티 거리 시위에서 등장했던 이 문장을, 페르난다 멜초르의 소설 『태풍의 계절』을 읽은 뒤 다시 떠올린다.
한 단락이 한 챕터다
베라크루스 변두리의 가상 마을 라 마토사. 관개(灌漑) 수로에서 ‘마녀’라 불리던 여인의 시체가 떠오른다. 멜초르는 이 살인 사건 주위를 네 명의 화자가 차례로 선회하도록 배치한다. 각 챕터는 단 하나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침표가 등장할 때마다 독자는 정지에 가까운 충격을 받는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의 한 평론가는 이 문장들을 ‘슬로 모션으로 흘러내리는 진흙 사태’라 묘사했는데, 정확한 비유다.
복화술의 언어
네 화자의 사투리, 미신, 두려움이 각기 다른 인간의 입에서 직접 쏟아지는 듯한 질감. 멜초르는 마녀의 죽음을 독을 증류(蒸溜)하듯 언어로 응축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족장의 가을』과 단락 구조만 닮았을 뿐, 마르케스가 화려한 가상 세계를 쌓아 올릴 때 멜초르는 그 덩어리들을 찢어발긴다. 그녀는 살해당한 여성에게 ‘마녀’라는 이름을 붙여 사건을 마법화하려는 사회적 충동에 정면으로 맞선다.
범죄의 진짜 좌표
마녀의 시체는 표면에 떠오른 증상일 뿐이다. 멜초르가 추적하는 범죄는 공동체 전체를 모욕하고 변형시킨 마초적 적의(敵意)의 기후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문득 한국의 뉴스 헤드라인을 떠올렸다. 혐오 범죄를 ‘정신 이상’으로 봉합하려는 익숙한 수사들.
멜초르의 진흙은 멕시코에만 흐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