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미국을 흔든 불, 한국어로 도착하다 —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The Fire Next Time) · 제임스 볼드윈 (James Baldwin) · 옮긴이 박다솜 · 열린책들 · 1963
한 호를 점령한 에세이
1963년 1월, 『뉴요커』가 이례적인 편집을 감행했다. 한 호의 상당 부분을 단일 에세이에 내주었다. 필자는 서른여덟 살의 흑인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 제목은 「이번에는 불이다(The Fire Next Time)」. 글은 두 편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조카에게, 두 번째는 미국 전체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해 말 책으로 묶인 이 에세이는 시민권 운동의 격랑 속에서 백인 중산층 독자에게 ‘폭로의 충격’으로 작동했다고 당대 비평가들은 기록한다. 57년이 지난 2020년, 열린책들에서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다.
설교단에서 시작된 문장
볼드윈의 문장은 독특한 호흡을 갖는다. 여러 종속절이 천천히 쌓이다가 명료하게 갈라지는 결구에 도달한다. 마치 설교단의 리듬이 산문에 녹아든 것 같다. 그는 할렘에서 소년 설교자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그때 익힌 호흡이 문장 안에 고스란히 남았다. 비평가 F. W. 듀피는 이 리듬 자체가 볼드윈의 도덕적 권위를 만들어 낸다고 평가했다. 정책을 제시하지 않고 절들의 리듬으로 사고하는 문장가. 그가 보기에 볼드윈은 분석가이기 이전에 예언자였다.
그러나 예언자라는 호칭에는 양날이 있다. ‘분석을 버리고 권면(勸勉)으로 후퇴했다’는 비판도 따라붙었다. 볼드윈이 백인 미국인은 죽음을 믿지 않는다 같은 단정적 명제를 던질 때, 어떤 독자는 입증 불가능한 수사로 읽었다. 동맹을 넓히기보다 분파를 자극하는 언어라는 우려도 있었다.
무고(無辜)라는 환상
이 책의 핵심 모티프 가운데 하나는 ‘백인의 무죄(white innocence)‘다. 볼드윈은 백인 미국인이 자신에게 흑인이 결여한 어떤 본래적 가치가 있다고 믿는 데서 인종주의가 시작된다고 진단했다. 흑인이 결핍된 존재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백인이 시혜자(施惠者)이자 측정자의 자리에 설 수 있다. 이 도식이 무너지는 순간, ‘무고한 백인’의 자기 인식도 함께 무너진다. 단순한 도덕적 호소가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의 산술적 기반을 드러낸 분석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 분석은 흔히 ‘통합주의 문헌’으로 분류되는 이 책의 위치를 재조정한다. 볼드윈이 요구한 것은 흑인이 백인 사회 안으로 단정하게 편입되는 풍경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의 정치·사회 구조 자체의 광범위한 재편을 말했다. 첫 흑인 대통령의 임기 안에서도 흑인 청년들이 거리에서 사살되는 광경이 반복된다는 사실은, 단순한 자리바꿈으로는 인종주의가 끝나지 않으리라는 그의 예견을 확인시킨다.
후계자가 아닌 빈자리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 원서 『이번에는 불이다(The Fire Next Time)』는 미국에서 다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제스민 워드가 엮은 선집 『이번에는 불이다』에는 클로디아 랭킨, 가넷 캐도건 같은 새로운 필자들이 볼드윈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거리를 두었다. 흑인 작가 대릴 핑크니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비어 있는 자리들을 남겼다.’
볼드윈이 그린 흑인 세계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기 어려워하는 수치심의 회로가 있었다. 새로운 세대의 필자들에게 그 수치심은 더 이상 출발점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을 보이지 않게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이 책을 다시 읽는 일은 60년대를 추모하는 일이 아니라, 거기서 미완으로 끝난 비평을 지금의 언어로 이어받는 작업에 가깝다.
리듬이 남긴 주문
핑크니는 볼드윈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 가지를 강조했다. 볼드윈의 권위는 정치 강령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의식 자체를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들여다보는 끈기에서 온다는 것. 그는 정체성을 본질이 아닌 ‘자기 경험을 마주하고 사용하는 방식’으로 정의했다. 이 비본질주의가 그를 어떤 정치적 시대에도 닳지 않게 만든다.
이 책은 분노의 기록이 아니다. 분노 안에 매혹과 사랑을 동시에 담아 두는 문장의 마법이다. 57년 전 미국의 불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도착했다. 이 책을 펼치는 독자에게 권한다. 볼드윈의 종속절이 어떻게 쌓이고, 어디서 갈라지는지 귀 기울여 보시라. 그 리듬 안에 여전히 풀리지 않는 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