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두려움의 군주정, 또는 철학자의 곤혹 — 타인에 대한 연민

「타인에 대한 연민」 (The Monarchy of Fear: A Philosopher Looks at Our Political Crisis) · 마사 누스바움 (Martha C. Nussbaum) · 옮긴이 임현경 · 알에이치코리아 · 2018

타인에 대한 연민 표지
「타인에 대한 연민」 (2018) 표지 © Open Library /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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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가을, 시카고대학교 캠퍼스에서 한 교수는 석연찮은 광경을 목격했다.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우리나라가 사라지고 있다”고 탄식했다는 것이다. 대선 결과에 충격받은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으나, 정치적 반대자를 ‘괴물’로 지목하고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정조는 교수를 당혹케 했다. 그 교수가 바로 마사 누스바움이다. 『타인에 대한 연민』은 그날 캠퍼스의 종말론적 분위기를 감정철학의 언어로 번역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학생들의 공포를 탓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려움은 인간의 원초적 정념이며, 문제는 그것이 어디로 흘러가느냐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군주제가 공포(恐怖) 위에 서듯, 민주주의는 신뢰 위에 서야 한다는 명제가 책 전체를 관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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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바움의 핵심 개념 가운데 ‘허가의 신호’는 눈여겨볼 만하다. 혐오 범죄가 폭증할 때 그것은 잠재된 적의가 갑자기 생겨난 탓이 아니다. 최고 권력자가 묵인과 동조의 신호를 보내면, 숨죽이던 증오가 무대 위로 성큼 올라온다. 소셜미디어는 이 증오를 ‘정보 폭포’로 가속화한다. 트위터적 즉답 문화는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은 즉시 말할 수 있다”는 환상을 퍼뜨리고, 숙고의 시간을 압살한다. 저자의 진단은 단순한 시사 논평이 아니라, 정념의 정치 생태계 전체를 해부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분노·시기·여성혐오가 뒤섞인 ‘독성 칵테일’ 앞에서 저자는 오히려 침착하다.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선택이자 실천적 습관’이라고 그는 말한다. 1950년대의 인종·성차별을 떠올린다면 미국은 여전히 그때보다 나아진 나라이며, 절망에 매몰되기를 거부하는 것 또한 시민의 덕목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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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찬사만으로 책을 덮기는 어렵다. 영미 평단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된 물음은 “그래서 어떻게”였다. 저자가 제안하는 3년 의무 시민복무제 같은 처방은 가장 호의적인 진보 독자에게조차 정치적으로 구현 불가능해 보인다. 누스바움이 설득하려는 ‘상대편’—분노한 백인 노동계급 보수층—은 결코 이런 책을 펼쳐들지 않을 것이라는 신랄한 지적도 있었다. 더 본질적인 비판은 역사적 시야의 부재다. 저자는 아이스킬로스와 세네카를 풍부하게 동원하지만, 그 고전들은 보복과 자수성가에 관한 미국 특유의 변경(邊境) 신화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멀다. 신뢰와 통치(統治)를 논하면서 토머스 홉스를 누락한 것 역시 학계에서 의아하게 받아들여졌다. 자연 상태의 두려움에서 사회계약을 도출한 홉스 없이 ‘군주제는 두려움 위에 선다’는 명제를 선언처럼 던지는 것은 사유의 부피를 깎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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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누스바움의 메시지가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철학자의 진단’이라기보다 ‘문명화된 시민의 권유’에 가깝고, 그 둘을 구별하지 않는 책 자체의 모호함이 결정적 손실이라는 평이 눈에 밟힌다. 희망과 사랑도 양날의 칼이다. 희망은 광신의 연료가 될 수 있고, 사랑 또한 배타적 결속의 도구로 동원된다. 저자가 종교를 시민적 결속의 원천으로 낙관하는 대목은 분열의 역사를 가볍게 보는 듯해 위태롭기까지 하다. 이쯤에서 책을 덮고 고개를 든다. 두려움과 증오의 독성 칵테일을 진단하는 글을 읽으면서, 정작 내 안의 두려움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들여다보기를 미룬 채 비평적 거리만 확보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철학자의 곤혹보다 독자의 비겁함이 먼저 지적되어야 하는 자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