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마침표가 건네는 초대장 — 충분하다
「충분하다」 (Wystarczy)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Wisława Szymborska) · 옮긴이 최성은 · 문학과지성사 · 2012
1.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 한 장. 산맥의 곡선, 강의 흐름, 평야의 초록이 있다. 그러나 집단 묘지는 없다. 폐허도 없다. 지도란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사물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마지막 시집 「충분하다」를 펼치면, 한 노시인이 그 거짓말 앞에 서 있다. 비난하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등고선을 따라가며 무언가를 기억하려 한다. 지도의 침묵 속에서 지워진 것들의 무게를 가늠한다. 2012년, 시인이 세상을 떠난 해에 폴란드에서 출간된 유고 시집이 십여 년이 지나서야 한국어로 도착했다. 열세 편의 시.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의 마지막 기록이라는 무게가 이 얇은 책 어깨 위에 올라와 있다. 그러나 쉼보르스카는 그 무게 따위 모르는 사람처럼 글을 썼다.
2.
그녀의 시는 평생 거대한 역사 서사 앞에서 한 발 물러서는 일을 해왔다. 집단의 비극을 고발하는 대신, 책상 위의 작은 물건, 지나가는 손, 우연히 떠오른 기억의 모서리에서 출발해 인간 존재의 무게에 도달하는 방식. 마지막 시집은 그 방식이 가장 짧고 가장 단단해진 풍경이다.
한 비평가는 그녀를 재즈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에 빗댔다. 어떤 노래에도 과잉된 감정을 쏟아붓지 않으면서 텍스트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노래의 진실을 드러내는 가수처럼, 쉼보르스카는 자기 시 안에서 결코 흥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절제를 차가움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죽음, 시간, 정치, 사랑 같은 거대한 주제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작게 만드는 방식이며, 그 작아진 자리에서 비로소 사물과 인간을 더 큰 시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누군가의 손」이라는 시가 있다. 화자는 이미 사라진 사람의 손이었던 어떤 손이 한때 어떤 사물을 만지고 어떤 글자를 적었는지를 더듬는다. 사적인 추모처럼 보이지만, 강제실종(强制失蹤)과 학살이 만든 20세기 동유럽의 빈자리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 큰 단어를 동원하지 않으면서 한 개인의 부재 안에 역사 전체의 그림자를 들여놓는 손길. 이것이 이 시인의 방법이다.
그녀는 노년의 거울 앞에서도, 자기에게 도착할 리 없는 우편물 앞에서도, 자기 연민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한다. 슬픔을 무대 위에 올리는 대신, 슬픔을 직시하고 다시 옆방으로 돌려보낸다. 죽음을 예고하는 비가(悲歌) 대신, 평생 자기 자신에 대해 농담을 건넬 줄 알았던 사람의 마지막 메모를 남겼다. 제목 ‘충분하다’가 그러하다. 삶에 대한 작별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의 양과 질에 대한 조용한 긍정이다.
3.
이 시집을 읽고 무언가 대단한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그녀의 시는 해석되기보다 그저 읽히기를 원하는 것 같다. 마침표 하나가 닫힌 결론이 아니라 독자에게 슬며시 건네지는 초대장처럼 작동하는데, 그 초대에 응하면 응할수록 내가 보태는 말은 불필요해진다.
이 시집은 미완성 상태로 남은 원고의 흔적을 매끄럽게 봉합하지 않는다. 한 시인의 마지막 작업대를 들여다보는 일. 거기엔 유언의 무게가 아니라 다음 책을 위해 펼쳐 두었던 메모의 가벼움이 있다. 그래서 읽는 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어쩔 수 없이 멈춰 서게 된다. 더 이상 새 시가 도착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충분하다, 고 시인은 썼다. 그 말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는 충분한가. 아직 모르겠다. 다만 이 시집 앞에서 내가 보태는 말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안다. 시인은 평생 자기 자신을 신탁자로 세우는 일에 무관심했다. 나는 어떤가. 이런 글 한 편에도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시인의 마침표 앞에서 나의 문장은 마침내 허둥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