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달에 리벳을 박은 남자, 인간은 아직 — 아르테미스

「아르테미스」 (Artemis) · 앤디 위어 (Andy Weir) · 옮긴이 남명성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

아르테미스 표지
「아르테미스」 (2017) 표지 © Open Library / 출판사

드와이트 가너는 《뉴욕타임스》 서평에서 앤디 위어를 이렇게 정리했다. “문제를 엔지니어링하는 재능은 완벽히 전시돼 있다. 인간을 엔지니어링하는 역량은 아직 다듬어져야 한다.” 혹평이라기보다는 정확한 진단에 가깝다. 위어의 두 번째 장편 ‘아르테미스’를 읽으면 이 문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2011년 자비출판으로 세상에 나온 ‘마션’은 기적 같은 궤적을 그렸다. 화성에 홀로 남겨진 우주비행사 마크 와트니가 감자를 재배하고 물을 합성하며 생존하는 이야기는 과학적 정밀함과 유머의 결합으로 전 세계 독자를 사로잡았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화까지 이어졌고, 위어는 SF 장르의 새로운 이름이 됐다. 그러니 차기작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아르테미스’의 무대는 인류 최초의 달 도시다. 다섯 개의 돔으로 이뤄진 이 식민지는 관광지이자 산업 전초기지로 기능한다. 주인공 재즈 바샤라는 스물여섯 살의 배달부 겸 밀수업자다. 가난한 구역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그녀에게 억만장자가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경쟁사의 채굴 장비를 파괴하면 거금을 주겠다고. 재즈는 일을 받아들이고, 사건은 도시 전체를 위협하는 음모로 번진다.

위어의 세계 구축은 여전히 경이롭다. 산소 공급 시스템, 알루미늄 제련 과정, 저중력 환경에서의 용접 기술, ‘슬러그’라 불리는 자체 통화 체계. 아르테미스라는 도시의 모든 리벳과 에어록이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독자는 재활용된 공기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디언》의 에릭 브라운이 “식민지 자체가 이 소설의 진정한 성취”라고 평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문제는 그 도시에 사는 인간들이다.

재즈는 영리하고 반항적인 캐릭터로 설계됐다. 거친 입담과 비꼬는 독백이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러나 300페이지에 걸쳐 계속되는 빈정거림은 피로(疲勞)를 넘어 권태(倦怠)로 향한다. 마크 와트니의 유머가 절박한 상황에서 피어난 생존의 방편이었다면, 재즈의 농담은 어딘가 계산된 느낌을 준다. 마치 작가가 ‘공감 가능한 여성 화자’의 매뉴얼을 역설계(逆設計)한 것처럼.

재즈의 아버지는 독실한 무슬림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딸을 데리고 달로 이주한 용접공. 딸의 선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적 신앙인과 그 신앙을 거부한 딸 사이의 긴장—이것은 소설에서 가장 입체적인 관계다. 그러나 위어는 이 갈등을 충분히 파고들지 않는다. 감정적 무게추가 될 수 있었던 서사가 플롯의 장식으로 남는다.

하이스트 플롯 자체는 기능적이다. 배신, 추격, 막판의 구원. 익숙한 박자로 사건이 전개되고, 액션 장면은 진정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특히 우주복을 입고 진공 속에서 작업하는 시퀀스들은 경이로움과 공포를 동시에 전달한다. 위어가 여전히 과학과 서스펜스를 결합하는 데 능하다는 증거다.

그러나 ‘마션’에 있던 것이 ‘아르테미스’에는 없다. 그것은 고립의 절박함이다. 화성에 홀로 남겨진 와트니는 죽음과 마주한 인간이었고, 독자는 그의 모든 계산과 실패에 함께했다. 재즈에게는 그런 실존적 무게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녀의 위기는 어디까지나 스릴러의 위기이지, 인간 조건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위어는 엔지니어다. 그는 세계를 설계하고, 문제를 제시하고, 과학으로 해결한다. 이 공식은 ‘마션’에서 완벽하게 작동했다. ‘아르테미스’에서도 절반은 작동한다. 달 도시는 믿을 수 있다. 달 도시에 사는 인간들은 아직 믿기 어렵다.

소설의 원제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신화의 달의 여신이자 사냥의 신이다. 재즈는 사냥감이 되었다가 사냥꾼이 되는 인물로 설정됐다. 그러나 신화적 이름을 붙인다고 캐릭터에 신화적 깊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름표(名札)는 붙었으나 영혼(靈魂)은 아직 입주하지 않았다.

위어의 다음 책이 궁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달에 도시를 세울 줄 안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그 도시에 살 만한 사람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