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가르침을 거부한 청년, 102년째 읽히다 — 싯다르타

「싯다르타」 (Siddhartha) ·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 옮긴이 박병덕 · 1922

싯다르타 표지
「싯다르타」 (1922) 표지 © Open Library / 출판사

102년 전 독일에서 출간된 얇은 소설 한 권이 여전히 팔리고 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1922)다. 영국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먼트》는 이 책을 두고 “배경이 어디든,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삶과 죽음의 근본적 물음을 마주하게 하는 명상의 공간”이라 평했다. 고대 인도가 무대고 주인공은 브라만 청년인데, 정작 이 책을 집어 드는 이들 대부분은 인도인도, 불교도도 아니다. 무엇이 이 이야기를 시대와 국경 너머로 밀어냈는가.

힌트는 주인공이 역사적 붓다 고타마를 만나는 장면에 있다. 싯다르타는 붓다의 깨달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이유는 간명하다. 깨달음은 가르침으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 스승의 진리가 아무리 완전해도, 그것은 스승이 직접 살아서 얻은 것이지 제자가 빌려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거부의 장면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헤세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다.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한 부모 밑에서 자라 동양에 대한 관심을 어린 시절부터 품었으나, 정작 그가 추구한 것은 특정 교리가 아니라 자기만의 길이었다.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싯다르타』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본질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주인공은 금욕의 수행자(修行者)로, 부유한 상인으로, 육체의 쾌락에 빠진 남자로 살아본 끝에야 비로소 강가의 뱃사공이 된다.

강물은 모든 시간을 동시에 흘려보낸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늘 새로우면서 영원하다. 헤세는 이 강물에서 ‘옴’의 소리를 듣게 한다. 분열된 자아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다. 문체도 독특하다. 헤세는 의도적으로 고풍스럽고 주문처럼 반복되는 문장을 썼다. 사건의 긴박함 대신 정신의 정거장들이 하나씩 지나가는 느린 구성이다.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명상에 참여하는 듯한 기분을 준다.

비평가들은 이 소설이 불교와 힌두교, 서양 개인주의를 혼합한 것이라 지적한다. 헤세의 인도가 지리적 현실이라기보다 유럽인의 정신적 갈망이 투사된 상징적 풍경이라는 비판도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 비판은 소설의 성취를 비껴간다. 『싯다르타』가 여는 것은 특정 종교의 문이 아니라, 어떤 배경의 독자라도 들어설 수 있는 사유의 자리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깨달음’은 어떤 형태로 소비되는가.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3분짜리 명상 영상, 성공한 CEO들의 아침 루틴, 마음 챙김 앱의 알림. 지혜(智慧)는 콘텐츠가 되었다. 전달 가능하고, 복제 가능하고, 구독 가능한 것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헤세의 싯다르타가 붓다의 가르침을 거부한 이유를 떠올려보자. 지혜는 전달되지 않는다. 살아야 하고, 겪어야 하고, 때로는 완전히 잃어버려야 비로소 손에 잡힌다. 자기계발 시장이 팔아치우는 ‘속성 깨달음’의 정반대편에 이 102년 된 소설이 서 있다.

나 역시 이 소설을 젊어서 읽었을 때와 지금 읽을 때가 다르다. 같은 문장이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의 진짜 작동 방식인지도 모른다.

강물은 돌아오지 않으면서 돌아온다. 독자 여러분은 지금 어느 여울목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