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고향이라는 유령 — 이향인

「이향인」 (The Parisian) · 라미 카민스키 / Isabella Hammad · 옮긴이 최지숙 · 2019

이향인 표지
「이향인」 (2019) 표지 © Open Library / 출판사

“추방당한 자에게 고향은 연인이 아니라 유령이다.” 영국의 비평가 마야 자글리(Maya Jaggi)가 《가디언》에서 이 소설을 두고 쓴 말이다. 이사벨라 하마드의 데뷔작 『이향인』은 500쪽이 넘는 분량으로 한 남자의 생애를 더듬지만, 그 남자는 끝내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오스만 제국 말기 팔레스타인 나블루스의 직물상 아들 미드하트 카말이 프랑스 몽펠리에로 떠나고, 다시 영국 위임통치 아래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旅程)—그것이 이 소설의 전부이자 전부가 아니다.


두 개의 몸, 두 개의 언어

1914년, 열여섯 소년 미드하트는 의학을 배우러 프랑스에 간다. 하숙집 딸 잔느트와의 연애는 헨리 제임스 소설처럼 조심스럽게 전개된다. 한 번의 눈맞춤, 손끝의 스침, 식탁 위 대화의 미세한 파열음. 하마드는 서두르지 않는다. 문화 간 오해(誤解)가 자라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사랑이 불가능으로 무르익는 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미드하트는 ‘파리지앵’이라는 별명을 얻지만, 정작 그를 규정하는 것은 파리도 나블루스도 아닌 ‘둘 사이의 공백’이다. 유럽에선 너무 동양적이고, 고향에선 너무 서양적인 남자—식민지 지식인의 분열(分裂)된 의식이란 클리셰로 치부하기엔, 하마드가 그린 미드하트의 내면은 지나치게 촘촘하고 지나치게 아프다.


역사는 헤드라인으로 오지 않는다

소설 후반부, 영국군이 나블루스에 진입하는 장면은 차갑다. 총성도 비명도 없이, 다만 어느 날 거리에 군화 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은 조금씩 말수를 줄인다. 《뉴욕타임스 북리뷰》의 파룰 세갈(Parul Sehgal)은 “역사가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지—헤드라인이 아니라 발밑의 땅이 서서히 무너지는 감각으로—이 소설은 이해시킨다”고 썼다. 미드하트가 파티마와 결혼하고, 의원을 열고, 민족주의 정치에 발을 담그는 과정에서 우리는 ‘국가의 탄생’이 아니라 ‘개인의 마모’를 목격한다. 그의 할머니 움 마흐무드가 보여주는 전통의 완강함은 손자의 근대적 교양보다 훨씬 오래 버틴다. 그 대조가 씁쓸하다.

혹자는 이 소설의 느린 호흡을 지루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트라우마를 소비 가능한 서사로 압축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결정이야말로 이 책의 윤리다. 오늘 가자(Gaza)에서 터지는 포탄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도 우리는 ‘역사’ 앞에서 무력하다. 숫자와 지명은 머리를 스쳐 가고, 공감은 채 닿기 전에 닳는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의 삶을 천천히 따라가는 인내심이다. 미드하트가 그토록 사랑했고, 끝내 돌아간 고향이 백 년 뒤에도 여전히 ‘분쟁 지역’이라는 사실은 소설 밖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주석이다.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릭은 일사에게 말한다. “우리에겐 항상 파리가 있잖아(We’ll always have Paris).” 미드하트에게 파리는 없다. 몽펠리에도, 나블루스도. 남은 것은 유령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