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죽은 자들 곁에서 산 자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 — 일요일에 잊힌 사람들

「일요일에 잊힌 사람들」 (Changer l'eau des fleurs) · 발레리 페랭 (Valérie Perrin) · 옮긴이 장소미 · 열린책들 · 2018

일요일에 잊힌 사람들 표지
「일요일에 잊힌 사람들」 (2018) 표지 © Open Library / 출판사

발레리 페랭의 소설 『일요일에 잊힌 사람들』은 과잉이다. 죽은 아이, 배신한 배우자, 폐허가 된 삶,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낯선 이의 유골함까지. 500쪽이 넘는 지면에 비극이 겹겹이 쌓인다. 제임스 우드는 《뉴요커》에서 이 소설의 고통이 “오페라적 강도”로 축적된다고 썼다. 정확한 진단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과잉은 소설을 망치지 않는다.

묘지라는 무대

주인공 비올레트 투생은 부르고뉴의 작은 묘지를 관리한다. 묘비를 닦고, 잡초를 뽑고, 조문객에게 차를 대접한다. 소설의 원제 ‘꽃의 물을 갈다(Changer l’eau des fleurs)‘는 그가 매일 반복하는 일과에서 왔다. 조화가 아닌 생화를 오래 살리려면 물을 갈아야 한다. 사소한 행위다. 그러나 이 일상이 소설 전체를 지탱하는 은유가 된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일은 거창한 추모가 아니라 매일의 돌봄이라는 것.

묘지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교차하는 문턱이다. 비올레트는 그 문턱에 서서 양쪽을 모두 바라본다. 낮에는 무덤에 물을 주고, 밤에는 자신의 과거와 대면한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비올레트의 상처(傷處)를 천천히 드러낸다. 결혼의 실패, 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에 얽힌 숨겨진 진실. 페랭은 급하지 않다. 퍼즐 조각을 하나씩 놓으며 독자가 스스로 그림을 맞추게 한다.

과잉의 윤리

그런데 문제는 조각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비극 위에 비극이 포개지고, 우연의 일치가 서사를 이끈다. 어느 날 묘지에 찾아온 낯선 남자가 어머니의 유골을 뿌리려 하는데, 그의 어머니와 비올레트의 과거가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구성의 정교함이라 말할 수도 있고, 작위적 설계라 비판할 수도 있다. 어느 쪽 해석을 택하느냐에 따라 이 소설의 평가는 갈린다.

하지만 페랭이 신뢰를 얻는 지점은 따로 있다. 그는 평범한 삶의 결(紋理)을 놓치지 않는다. 묘지 일의 계절적 리듬, 소도시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누는 잡담, 월급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조바심. 그가 그리는 프랑스는 관광 엽서의 파리도 로망의 시골도 아니다. 잊힌 사람들의 프랑스다. 묘지에 묻힌 이들처럼 사회가 기억하지 않는 삶들. 비올레트 역시 그런 삶 중 하나다.

슬픔을 견디는 법

소설은 슬픔에 거짓 위안을 주지 않는다. 어떤 상실은 극복되지 않는다. 다만 수용될 뿐이다. 비올레트는 딸을 잃은 후 세상에서 물러났지만, 완전히 죽지도 않았다. 묘지라는 경계에 머물며 산 자의 시간과 죽은 자의 시간 사이를 오간다. 이 정지된 삶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움직임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소박하고 느리다. 꽃에 물을 갈듯, 매일 조금씩.

페랭의 산문은 번역을 거쳐도 힘을 잃지 않는다. 문장은 간결하고, 감정은 절제되어 있다. 멜로드라마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문체가 그것을 배반하지 않는다. 과잉은 플롯에 있을 뿐, 문장에는 없다.

기억의 방식

이 소설이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를 이제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잊히고 싶지 않다. 죽은 후에도 누군가 자신의 무덤에 꽃을 놓아주기를, 그 꽃의 물을 갈아주기를 바란다. 비올레트는 그 바람을 대신 들어주는 사람이다. 낯선 이의 무덤에도 정성을 쏟고, 조문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망각(忘却)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 기억이라면, 그는 직업적으로 기억하는 자다.

어쩌면 소설 자체가 그런 행위인지도 모른다. 문학이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질 삶들, 역사가 기록하지 않는 평범한 비극들. 페랭은 그것들을 500쪽에 걸쳐 붙잡아둔다. 과잉이라는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 과잉은 선택이다. 모든 슬픔을 담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일요일에 잊힌 사람들』은 완벽한 소설이 아니다. 하지만 불완전함 속에 정직함이 있다. 삶이 원래 그렇듯, 이 소설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믿게 된다. 실패가 곧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감수한 시도가 때로 진심을 증명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