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평

폐허가 된 얼굴이 말하는 것 — 연인

「연인」 (L'Amant (The Lover)) · 마르그리트 뒤라스 (Marguerite Duras) · 옮긴이 김인환 · 민음사 ·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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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서랍을 정리하다 스무 살 적 사진을 발견했다. 얼굴이 낯설었다. 저 사람이 나였던가. 피부의 탄력, 눈빛의 선명함, 아직 아무것도 겪지 않은 자의 무지한 자신감. 사진을 내려놓으며 거울을 보았다. 주름이 새겨진 현재의 얼굴 위로 과거의 얼굴이 겹쳤다가 사라졌다. 기묘한 건 그 순간 느낀 감정이 상실감이 아니라 일종의 안도였다는 점이다. 젊은 얼굴은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지금의 얼굴은 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한 남자가 늙은 화자에게 말한다. 젊었을 때의 당신 얼굴보다 지금의 폐허가 된 얼굴이 더 좋다고. 앙겔라 카터는 이 대목을 두고 “시간의 폭력에 대한 책”이라 썼다. 아름다움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 이 소설은 그 물음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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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1929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열다섯 살 프랑스 소녀가 메콩강을 건너는 배 위에서 스물일곱 살 중국인 남자를 만난다. 소녀는 가난하고 남자는 부유하다. 소녀는 백인 지배계층이고 남자는 피지배계층이다. 둘은 연인이 된다. 숄롱의 어느 방에서 그들은 정사를 나누고, 남자의 운전기사는 밖에서 기다린다.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관계. 그래서 반드시 끝나야 하는 관계. 여기까지만 보면 이국적 배경의 금지된 연애담이다. 하지만 뒤라스는 이야기를 직선으로 풀지 않는다. 메콩강 도하 장면은 책 초반에 등장했다가 수십 페이지 뒤에 다른 각도로 다시 나타난다. 같은 사건이 다른 빛 아래 놓인다. 기억이란 원래 그렇다.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층위를 이루며 쌓인다. 한 번의 서술이 이전 서술을 가리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한다. 뒤라스는 기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글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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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감정 온도는 기이하다. 동시에 뜨겁고 차갑다. 성애 장면은 솔직하되 음탕하지 않다. 너무 많은 슬픔이 배어 있어서다. 중국인 연인은 책 내내 다소 흐릿하게 남아 있다.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않는다. 그는 인물이라기보다 상징에 가깝다. 금지된 타자, 탈출구, 소녀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열렬한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한 거울. 반면 뒤라스는 가족에게 잔인하다. 광기 어린 어머니, 폭력적인 큰오빠, 기능하지 않는 가정. 뒤라스는 그 실패를 경제적인 문장으로 기록한다. 불필요한 형용사가 없다. 문장은 짧고 선언적이다. 같은 구절이 반복되며 거의 음악적 효과를 낳는다. 시제가 갑자기 바뀌고 인칭이 흔들린다. 독자는 발을 딛고 서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책을 읽어나간다. 이것이 방법이다. 기억은 안정적인 땅이 아니다. 뒤라스는 불안정을 형식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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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커모드는 이 책이 “서정적 압축”을 성취한다고 썼다. 백여 쪽 남짓한 분량이 훨씬 긴 소설보다 깊은 깊이를 담는다고. 뒤라스는 마치 문장 하나하나에 대가를 치르듯, 언어가 희소한 자원인 양 아끼고 또 아낀다. 식민지의 위계, 위선, 기묘한 친밀함이 그 안에 압축되어 들어간다. 낭만화하지도 단죄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세계 안에서 살았던 자의 정밀한 시선이 있을 뿐이다. 소설 말미, 수십 년이 흐른 뒤 중국인 남자가 전화를 건다.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며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라고. 뒤라스는 이 장면 뒤에 더 이상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침묵이 문장보다 많은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나는 그런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 책의 깊이를 진정으로 아는지 확신할 수 없다. 다만 폐허가 된 얼굴이 젊은 얼굴보다 나을 수 있다는 문장 앞에서, 잠시 멈춰 섰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