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비발디와 나: 어깨 위에 손 하나, 그것만으로
「비발디와 나」 (Primavera) · 다미아노 미키엘레토 (Damiano Michieletto) · 2026
자루 속 고양이들
베네치아 운하의 탁한 물. 자루가 수면을 친다.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이 있다. 새끼 고양이들이다. 자루는 천천히 가라앉는다. 카메라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18세기 베네치아의 고아원,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 그곳은 동화 속 요람이 아니다. 다미아노 미키엘레토 감독의 ‘비발디와 나’는 첫 장면부터 관객의 낭만적 기대를 수장(水葬)시킨다. 고아원은 자선의 공간이 아니라 착취의 공간이다. 버려진 아이들은 음악을 배운다. 부유한 귀족들의 오락거리가 되기 위해서다. 부자들의 유흥은 가난한 자들의 노역이다. 이 공식은 300년 전에도 작동했다.
비발디 전기영화가 아니다
제목에 ‘비발디’가 들어간다. 그러나 이 영화는 비발디 전기물이 아니다. 감독 스스로가 그렇게 선언한다. “아마데우스 같은 사실주의 역사영화도 아니다. 두 개인에 관한 영화다.” 안토니오 비발디(미셸 리온디노)는 고아원에 부임한다. 그는 소녀 체칠리아(테클라 인솔리아)에게서 특이한 것을 발견한다. 이 아이는 칭찬을 위해 연주하지 않는다. 비발디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지만, 영화는 그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 체칠리아가 중심이다. 비발디는 주변부에 머문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미덕이다. 실존 인물의 광휘(光輝)가 허구의 인물을 집어삼키는 일은 전기영화의 고질병이다. 미키엘레토는 그 함정을 의식적으로 회피한다.
한 번의 접촉, 어깨 위에 손
체칠리아와 비발디 사이에는 로맨스가 없다. 감독은 분명히 말한다.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음악이다.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야망이다.” 두 사람의 서사는 단 한 번의 신체 접촉으로 귀결된다. 어깨 위에 손 하나. 그것이 전부다. 이 절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성의 몸은 소유의 대상이 되어왔다. 고아원의 소녀들은 언제든 팔려나갈 수 있었다. 체칠리아에게도 혼인(婚姻)이 강요된다. 결혼하면 음악을 그만둬야 한다. 그녀의 선택지는 없다. 없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선택한다. 어깨 위의 손은 연민도 아니고 소유도 아니다. 인정이다. 동등한 예술가로서의 인정.
비발디의 음악, 현대의 사운드트랙
음악 사용이 독특하다. 극중에서 연주되는 음악은 비발디의 것이다. 그러나 배경 사운드트랙은 현대 작곡가 파비오 마시모 카포그로소의 작품이다. 시대극에서 이런 선택은 위험하다. 역사적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은 이 위험을 감수한다. 시대 고증보다 영화의 내적 감정선을 택한 것이다. 나는 이 결정에 동의한다. 비발디의 음악은 아름답지만 현재의 관객에게 거리감을 줄 수 있다. 현대 사운드트랙은 그 거리를 좁힌다. 300년 전 소녀의 고통이 지금의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테클라 인솔리아의 얼굴
테클라 인솔리아는 신인이다. 그녀의 연기는 절제되어 있다. 과잉(過剩)이 없다. 체칠리아는 말이 없는 인물이다.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호흡으로 연기한다. 바이올린을 켤 때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풀려난다. 억눌렸던 것이 분출되는 순간이다. 나는 이런 순간들을 위해 영화관에 간다. 서사가 아니라 찰나다. 서사는 잊혀도 찰나는 남는다.
착취의 구조는 지금도
고아원은 300년 전 이야기다. 그러나 착취의 구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성들은 여전히 사용되고 강요당하며 선택할 자유를 박탈당한다. 미키엘레토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거기에 있다. “여성에게 거의 어떤 자기결정권도 없던 시대에 관한 영화다.” 그가 말하는 ‘시대’는 과거형이 아니다. 지금이다. 여기다. 영화 속 체칠리아는 결국 자유를 쟁취한다. 순교가 아니다. 조용하되 단호한 선택이다.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내가 이 영화에 기대하는 것은 감동이 아니다. 분노다. 분노하되 체념하지 않는 것. 300년 전 소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을 수 있는가. 동등한 인간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