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이
무진 霧津
출판 편집자 · 칼럼니스트
무진의 시네마 노트
책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다시 책으로 건너간다. 특이할 수도 있는 나만의 시선으로 분석한 글을 매일 쓴다. 그리고 제일 마음에 드는 글만 올린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가장 좋아한다.
총 23편
- 「피키 블라인더스」
면도날을 캡 챙에 꿰어 넣은 자들 — 피키 블라인더스
지난주 버밍엄 출장길에 오래된 펍에 들렀다. 벽에 1920년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석탄 분진이 뿌옇게 앉은 거리, 납작모를 깊이 눌러쓴 남자들. 그 사진 아래 작은 팻말이 있었다. "피키 블라인더스가 이 동네를 지배했다." 나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그 문장을 한참 들여다봤다. 전쟁에서 돌아온 자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거리를 점거했던 시절. 스티븐…
- 「트로이」
규모(規模)가 곧 위대함인가 — 트로이
1억 7500만 달러. 배 천 척이 해변을 메우고, 수만의 군사가 평야를 가로지르며, 163분의 러닝타임 동안 고대 트로이의 성벽이 무너지는 데 투입된 금액이다. 볼프강 페터젠의 '트로이'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스케일은 언제 감동이 되고, 언제 공허가 되는가.
-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절대반지가 사라진 뒤, 남는 것 —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물속으로 빠져드는 금빛 고리 하나. 스미골의 손가락이 데아골의 목을 조르는 순간, 피터 잭슨의 카메라는 반지를 향한 인간(혹은 호빗)의 욕망이 얼마나 추악한 형태로 귀결되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은 이 회상으로 문을 연다. 뉴욕타임스의 A.O. 스콧은 이 3부작을 "최근 기억에서 가장 야심 찬 영화적 시도"라 평했는데,…
- 「아바타」
판도라의 숲, 자본의 불도저 앞에 서다 — 아바타
제임스 카메론은 『타이타닉』 이후 12년간 침묵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심해 탐사선을 타고 바다 밑바닥을 누볐고,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만들어냈으며, 컴퓨터 앞에서 단 한 프레임의 이미지를 위해 수천 번의 렌더링을 반복했다. 할리우드는 그를 잊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 「대부」
어둠 속에서 시작되는 미국의 자화상 — 대부
화면이 열리면 보이는 것은 거의 없다. 어둠이다. 극도로 억제된 조명 아래, 한 남자의 얼굴만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는 딸의 결혼식 날, 딸을 폭행한 남자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청탁하러 왔다.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카메라는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그제야 우리는 이 남자가 누군가의 앞에 앉아 있음을, 그 '누군가'가 모든 것을 들으며 고양이를 쓰다듬고…
- 「모아나 2」
바다는 여전히 부르는가 — 모아나 2
섬 끝에 선 소녀의 실루엣이 보인다. 파도가 발밑에 부서지고, 바람이 검은 머리카락을 수평선 쪽으로 밀어낸다. 8년 전 같은 자리에서 그녀는 "얼마나 멀리"를 노래했다. 이제 그녀는 성인이 됐고, 항해사가 됐고, 지도자가 됐다. 그런데 왜 다시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곳을 바라보는가. '모아나 2'는 이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장면이 품은 불안이…
-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
춤을 멈출 수 없었던 남자가 남긴 마지막 리허설 —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
케니 오르테가 감독은 잭슨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한다. 2009년 6월, LA 스테이플스 센터에서의 리허설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잭슨은 무대에서 내려오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음향 담당자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 부분, 좀 더 천천히 끓여봐요(Let it simmer)." 요리할 때 쓰는 표현이었다. 밴드가 연주한 'Human Nature'의…
- 「와일드 로봇」
단풍잎과 회로 사이 — 와일드 로봇
기계가 그리움을 학습할 수 있을까.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얼리히가 이 영화의 핵심을 짚었다. 가을 낙엽이 휘날리는 숲 속에서 로봇 로즈가 홀로 서 있다. 입양한 새끼 기러기가 비행 연습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장면. 기다림을 픽셀과 폴리곤으로 구현한 그 장면에는 실사가 닿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 「타이타닉」
침몰(沈沒)의 역학 — 타이타닉
잠수정의 조명이 해저 3,800미터를 훑는다. 80년 묵은 녹슨 선체가 어둠 속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카메라가 창문을 뚫고 선실 안으로 들어가면, 바닥에 흩어진 도자기 파편과 찌그러진 금속 프레임이 보인다. 그 위로 소녀의 누드 데생이 천천히 화면에 잡힌다.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은 그렇게 시작한다. 죽음의 바닥에서 사랑의 흔적을 건져 올리는…
- 「왕좌의 게임」
데이비드 베니오프와 D.B. 와이스에게 — 왕좌의 게임
판타지는 이 땅에서 오래도록 유아용 장르로 취급받아 왔습니다. 고무 괴물과 합판 성벽, 말이 안 되는 설정. 그런데 당신들이 『왕좌의 게임』으로 해낸 것은 판타지의 문법을 완전히 파괴한 행위입니다. 용과 드래곤이 나오는데 이것이 장미전쟁 시대 영국 궁정극처럼 느껴지다니요. 성공이 아니라 장르에 대한 배반(背叛)입니다.
- 「문워커」
문워커: MTV 시대의 가장 값비싼 자기모순
이 영화는 실패했다. 상업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그렇다. '문워커'는 뮤직비디오를 장편 극영화로 늘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대규모 실험이었고, 그 실험은 정확히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좌초했다. 2700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경악스러운 제작비, ILM의 최첨단 특수효과, MTV가 키운 스타의 절정기 권력. 이 모든 것이 결집했음에도…
- 「프리티 리썰」
포인트 슈즈에 묻은 피, 또는 신체의 문법 — 프리티 리썰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석양이 길게 늘어진다. 버스 안, 젊은 여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지쳐 있다. 누군가는 다리를 쭉 뻗어 스트레칭하고, 누군가는 헤드폰 너머의 음악에 빠져 있으며, 누군가는 옆자리 동료와 낮은 목소리로 험담을 주고받는다. 발목에 감긴 테이프, 젖은 레오타드 위로 덧입은 후드티, 트렁크 가득 쌓인 토슈즈 가방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 「어벤져스」
앙상블의 무게, 혹은 블록버스터가 캐릭터를 믿을 때 — 어벤져스
쉴드 연구 시설의 지하. 푸른빛이 감도는 큐브가 스스로 맥동하기 시작한다. 비상등이 점멸하고 과학자들이 황급히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사이, 공간이 찢어지듯 열리며 한 남자가 등장한다. 로키. 그는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요원들의 의지를 빼앗고 테서랙트를 손에 쥔다. 시설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그의 표정은 태연하다. 이 순간 닉 퓨리가…
- 「슈렉」
녹색 피부의 반란, 혹은 동화의 사후 세계 — 슈렉
마이크 마이어스는 이미 녹음을 거의 마친 상태였다. 캐나다 출신 코미디언 특유의 평범한 북미 억양으로 슈렉의 대사를 완성해가던 중, 그는 돌연 방향을 틀었다. 스코틀랜드 억양으로 전면 재녹음하겠다는 것이었다. 드림웍스 경영진은 경악했다. 이미 투입된 제작비와 일정을 생각하면 무모한 요구였다. 그러나 마이어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이 초록 괴물에게…
- 「더 브루탈리스트」
콘크리트의 무게, 견딤의 무게 — 더 브루탈리스트
지난주 청담동 어딘가에서 오래된 노출 콘크리트 건물을 보았다. 벽면의 거푸집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세월에 닳아 군데군데 철근이 드러나 있었다. 한때 그 거친 표면이 실험적이고 전위적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저 낡은 건물이다. 브래디 코베이 감독의 '더 브루탈리스트'를 보며 그 건물이 자꾸 떠올랐다.
- 「코렐라인: 비밀의 문」
버튼 눈을 거부한 아이, 불완전한 세계를 선택하다 — 코렐라인: 비밀의 문
어릴 적 밤마다 읽던 그림책이 있었다. 어머니가 다정하게 읽어주시던 그 이야기 속에는 으레 마녀가 등장했고, 숲이 있었고, 아이가 길을 잃었다. 무서웠지만 덮을 수 없었다. 그 공포가 이상하게 달콤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동화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세상의 어둠을 아이들에게 미리 맛보게 하되,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장치. 헨리 셀릭…
- 「드라큘라」
드라큘라, 애도(哀悼)의 형식으로 쓴 잔혹사
영화 중반, 저주받은 블라드가 훼손된 제단 앞에 선다. 촛불이 꺼진 성당. 그는 더 이상 응답하지 않을 신에게 말을 건넨다. 목소리는 떨리고, 얼굴은 음영 속에 파묻혀 있다. 카린 쿠사마 감독의 '드라큘라'는 이 한 장면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분명히 선언한다. 이것은 공포영화가 아니다. 비극이다.
- 「인사이드 아웃 2」
'인사이드 아웃 2': 불안은 적인가, 동지인가
켈시 만 감독은 픽사 내부에서 10년을 준비했다. 스토리 수퍼바이저로 '몬스터 대학교'와 '굿 다이노'를 거치며 이 회사의 문법을 체득했다. 그가 첫 장편으로 전작의 속편을 택한 건 무모한 선택이었다. 2015년 피트 닥터가 만든 원작은 감정의 시각화라는 측면에서 이미 완결된 세계였다. 거기에 뭘 더 붙인다는 말인가.
- 「이니셰린의 밴시」
손가락을 자르는 남자, 대화를 포기하는 우리 — 이니셰린의 밴시
지난봄, 오랜 벗과 연락이 끊겼다. 다툰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그가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다음 날도, 그다음 주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를 묻는 메시지에 그는 딱 한 줄만 남겼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한동안 그 문장을 들여다보았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는 내내 그 메시지가 떠올랐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실패했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는 실패작이다. 적어도 그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는. 여든을 넘긴 노인이 「바람이 분다」(2013)로 이미 완벽한 유서를 써 놓고서 다시 책상 앞에 앉은 이유는, 제 죽음을 제 손으로 통제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통제되지 않는다. 노인은 자신의 카논에서 가장 값비싼 조각들—센과…
- 「마이클」
팝의 왕은 언제 죽었는가 — 마이클
안톤 후쿠아는 흑인 액션 스타를 가장 잘 찍는 감독으로 불려왔다. 덴젤 워싱턴을 '트레이닝 데이'로 오스카에 올렸고, 동시에 그를 '이퀄라이저' 시리즈의 노년 액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그런 그가 마이클 잭슨의 전기 영화를 맡았다. 주연은 자파 잭슨, 마이클의 조카이자 저메인 잭슨의 아들이다. 조카가 삼촌을 연기한다. 혈연이 분장을 대체하고, DNA가…
- 「비발디와 나」
비발디와 나: 어깨 위에 손 하나, 그것만으로
베네치아 운하의 탁한 물. 자루가 수면을 친다.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이 있다. 새끼 고양이들이다. 자루는 천천히 가라앉는다. 카메라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18세기 베네치아의 고아원,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 그곳은 동화 속 요람이 아니다. 다미아노 미키엘레토 감독의 '비발디와 나'는 첫 장면부터 관객의 낭만적 기대를 수장(水葬)시킨다. 고아원은…
- 「프로메테우스」
거장의 야심, 그리고 빠진 한 가지 — 프로메테우스
리들리 스콧의 거장다운 야심작에 빠져 있는 한 가지가 있다. 「에이리언」(1979)이 가졌던 결정적인 한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