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좋은 예언은 실현되지 않는다 — 듄: 파트2
「듄: 파트2」 (Dune: Part Two) · 드니 빌뇌브 (Denis Villeneuve)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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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답을 피해왔다. 정의를 내리는 순간 예외가 생기고, 예외를 인정하면 정의가 무너지니까. 그런데 《듄: 파트2》를 보고 나서는 좀 다른 방식으로 묻게 된다. 좋은 영화는 관객을 어디에 데려다 놓는가. 승리의 광장인가, 패배의 언덕인가, 아니면 둘 다 아닌 어떤 불안정한 경사면인가.
드니 빌뇌브의 두 번째 아라키스 여행은 2021년의 전반부가 축적한 모든 세계 구축을 회수한다. 1편이 건축 도면이었다면, 2편은 그 건물에서 벌어지는 화재(火災)다. 폴 아트레이디스는 프레멘의 구세주가 되고, 성전은 시작되며, 검은 태양 아래서 칼이 부딪힌다. 나는 또 속았다. 영웅 서사의 껍질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영웅 서사에 대한 경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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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뇌브는 매 숏을 회화처럼 다룬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번에는 회화의 경계를 넘어 조각의 영역까지 침범한다. 그레이그 프레이저가 찍은 아라키스의 모래는 석회 프레스코의 질감이고, 기에디 프라임의 하콘넨 경기장은 검은 태양 아래서 인간의 피부를 잿빛으로 변환시킨다. 흑백이 아니라 빛 자체가 색을 먹어버린 세계. 나는 이 시퀀스를 보면서 동시대 블록버스터 중 이 정도의 개념적 도박을 감행한 작품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었다. 떠오르지 않았다.
샌드웜 소환 장면의 사운드 디자인은 별도로 언급할 가치가 있다. 한스 짐머의 스코어는 저주파 영역에서 불안을 직조한다. 스피커가 아니라 갈비뼈가 공명하는 느낌. 이 영화는 IMAX 상영관에서 보는 것이 권장된다는 마케팅 문구를 달고 나왔지만, 그 문구는 과장이 아니다. 빌뇌브는 스케일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체감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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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념비는 인물을 압도한다.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에를리히는 이 영화에 C를 주며 반대 의견을 냈다. 폴의 내면 여정—예지력의 유혹, 예언자가 되는 정치학—이 너무 거대한 스케일로 렌더링되어 인간적 굴곡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폴의 사고 변화를 감지하려는 것이 “기에디 프라임 검투장의 거대한 콘크리트 슬래브에서 작은 금 하나를 찾으려는 것과 같다”고 썼다. 과장된 비유지만, 과장이 가리키는 곳은 정확하다.
티모시 샬라메는 1편의 내성적 청년을 벗어던지고 무섭도록 단호한 청년 군주가 된다. 예언을 무기로 휘두르는 법을 배운 얼굴. 문제는 그 변화가 급격하게 느껴지면서도 세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어떻게 변했나’보다 ‘변한 결과’를 더 많이 보여준다.
젠데이아의 채니가 그 빈자리를 메운다. 폴의 궤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젠데이아의 얼굴에 반사된 것이다. 연인이 자신이 불신하도록 교육받은 존재로 변모하는 것을 지켜보는 여자. 그녀는 관객에게 상실의 감각을 위치시켜주는 감정적 문법이다. 폴-채니 로맨스가 충분히 뜨겁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사랑 이야기가 예언의 부속품이 되어버렸다는 것. 나는 그 지적에 반쯤 동의한다. 반쯤은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로맨스는 원래 비극을 위한 연료이지, 그 자체로 연소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스틴 버틀러의 페이드-라우사는 별개의 영화를 훔쳐간다. 창백하고 의례화된 잔혹함. 폴의 안티테제로 설계된 캐릭터지만, 버틀러의 카리스마는 때로 아트레이디스 진영 전체를 압도한다. 악역이 주역을 잡아먹는 구조적 아이러니. 《사이트 앤 사운드》의 킴 뉴먼은 이 점을 정확히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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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예언은 실현되지 않는다.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소설이 50년 넘게 전해온 메시지다. 카리스마 있는 구원자를 경계하라. 원주민의 종말론이 식민 왕조의 엔진으로 전용(轉用)되는 과정을 주의 깊게 보라. 빌뇌브는 이 경고를 스크린에 옮기는 데 성공했는가? 부분적으로 그렇다. 승리처럼 보이는 것이 전락(轉落)일 수 있다는 양가성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양가성은 영화 자체의 문법보다는 관객의 사전 지식에 더 많이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에 이 이야기가 울리는 지점이 있다. 사막의 원주민을 해방시키겠다고 도착한 외부자가 결국 그들의 신앙을 이용해 자신의 왕좌를 세운다. 해방과 정복의 문법이 얼마나 쉽게 뒤바뀌는지.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21세기의 여러 ‘해방 전쟁’을 떠올렸다. 빌뇌브가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모른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상관없다. 텍스트는 저자보다 오래 산다.
클라이맥스의 결투는 멈춤이지 종결이 아니다. 아냐 테일러-조이의 알리아가 잠깐 얼굴을 비추며, 아직 오지 않은 전쟁들을 예고한다. 이 영화는 시작과 끝이 없다. 허버트의 중간에서 출발해 허버트의 끝 이전에 멈춘다. 감정적 계약은 관객의 사전 투자에 크게 의존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걸작인지 아닌지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다. 이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문장의 일부니까.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스트리밍이 영화의 상상력 스케일을 줄여온 시대에, 3시간짜리 IMAX 이벤트로 기획된 이 프로젝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선언이라는 점. 빌뇌브는 영화관이라는 매체에 대한 신임 투표를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록될 가치가 있다.
채니가 성전으로 향하는 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한다. “이것은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니야.” 맞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