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아임 스틸 히어,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아임 스틸 히어」 (Ainda Estou Aqui) · 월터 살레스 (Walter Salles) · 2024

아임 스틸 히어 (2024) 이미지
「아임 스틸 히어」 (2024) 이미지 © TMDb

[1] 월터 살레스의 「아임 스틸 히어」는 137분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만들어 놓고, 극장을 나선 뒤에야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내가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좀 불쾌한 일이다.

이 영화는 잘 만들어졌나? 묻는다면 답은 복잡하다. 1970년대 브라질 군사독재 시기, 엔지니어였던 남편 루벤스 파이바가 느닷없이 끌려간 후 사라져버린 가족의 이야기다. 남겨진 아내 에우니시(페르난다 토리스)는 다섯 아이를 키우고 변호사가 되어 남편의 흔적을 좇는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정치 탄압 피해 가족의 눈물 나는 투쟁’이라는 익숙한 공식이 떠오른다. 그런데 살레스는 그 공식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2] 이 영화는 왜 남편이 끌려가는 장면을 비명 한마디 없이 처리했나? 답: 비명이 필요 없어서다.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 아이들은 방에서 자고 있었고, 아내는 잠옷 차림이었다. 끌려가는 남편은 “걱정 말아, 곧 돌아올 거야”라고 말한다. 이게 전부다. 총소리도, 구타도, 절규도 없다. 관객은 오히려 기이한 정중함에 숨이 막힌다. 왜냐하면 그날 이후 정권이 “그런 사람을 체포한 적 없다”고 발뺌하기 시작하면서, 이 가족이 싸워야 할 대상이 ‘폭력’에서 ‘부인(否認)‘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왜 피해자 가족의 슬픔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나? 답: 슬픔보다 더 무서운 게 있어서다. 에우니시는 남편의 시신은커녕 사망 확인조차 받지 못한 채 수십 년을 보낸다. 그녀가 흐느끼는 장면은 거의 없다. 대신 아이들 앞에서 미소 짓고, 관공서에서 서류를 찾고, 취직해서 돈을 번다. 토리스의 연기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감정의 억제로 모든 것을 말한다. 웃으라는 사진사의 요청에 겨우 입꼬리를 올리는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비로소 ‘존엄’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보았다.

이 영화는 왜 슈퍼8 필름 같은 낡은 화면을 쓰나? 답: 이건 뉴스가 아니라 기억이어서다. 살레스는 해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보사노바, 친구들이 드나드는 거실의 풍경을 마치 오래된 가족 영상처럼 담는다.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슬프다. 곧 잃어버릴 일상의 잔상이니까. 질베르투 질의 노래가 흐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음악이 슬퍼서가 아니라 기억이 항상 늦게 도착하기 때문이다.

[3] 영화 후반부, 에우니시는 마침내 남편의 사망 확인서를 받는다. 1996년이다. 체포 후 25년 만이다. 그리고 2014년, 노년의 에우니시(친모 페르난다 몬테네그로가 연기한다)는 진실화해위원회가 남편의 죽음을 공식 인정하는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알츠하이머가 진행 중인 그녀는 이미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여기서 살레스가 던지는 질문이 심상찮다. 국가가 지워버린 사람을, 가족의 기억마저 지워버리면 그 사람은 진짜 사라지는 걸까? 그렇다면 진실화해위원회의 인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죽은 자를 위한 것인가, 살아남은 자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망각하고 싶은 국가를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이 낯설지 않은 건, 우리에게도 ‘실종’의 역사가 있어서다. 광주에서, 제주에서, 한강에서 사라진 사람들. 국가가 “그런 일 없었다”고 부인하거나, “이미 끝난 일”이라고 덮으려 했던 역사. 살레스의 영화가 브라질 보우소나루 시대를 통과하며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건 과거에 대한 추모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경고다. 권위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퇴장(退場)과 재등장(再登場), 은폐(隱蔽)와 폭로(暴露)를 반복할 뿐이다.

[4] 자, 그래서 이 영화가 잘 만들어졌느냐고? 마지막 30분이 조금 늘어진다. 1996년과 2014년을 오가며 여러 번의 ‘거짓 결말’을 만들어낸다. 감정의 정점이 어디인지 모호해진다. 이건 분명한 단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늘어짐이 싫지 않았다. 이 사람들과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그랬듯, 거대한 정치사를 한 가족의 식탁 위로 굴절시키는 영화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살레스의 이 작품은 ‘중앙역’ 이후 그가 브라질에서 가장 자유롭게 숨 쉬는 영화다. 페르난다 토리스의 연기는 올해 본 것 중 가장 단단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좋은 영화란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라고 했는데, 지금 열심히 설명하고 있네. 이게 바로 평론가라는 직업의 비극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야 먹고사니까. 아, 그냥 영화나 보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