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이
차은 車隱
전직 영화담당 기자
차은의 무비홀릭
외국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작은 매체여서 영화리뷰는 언제나 막내인 나의 일. 오랜 타지 생활에도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영화로 우리 시대와 사회를 들여다본다.
총 58편
- 「인 더 밸리 오브 엘라」
엘라 계곡의 전사, 토막난 귀환
뉴멕시코 변두리, 편의점 간판과 모텔 창문이 평평한 햇빛에 눌려 있다. 퇴역 헌병 행크 디어필드는 이라크에서 막 돌아온 아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테네시에서 차를 몰았다. 영화는 이 노인의 차창 밖을 오래 비춘다. 살인 수사의 껍데기로 시작하지만, 칼끝은 전쟁터가 아니라 귀환자의 내면을 겨눈다.
- 「귀여운 여인」
귀여운 여인, 명품 로고로 덮은 핏자국
1990년 할리우드산 로맨틱코미디가 30년 넘은 한국 사회의 거울 앞에서 되살아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귀여운 여인』은 그 물음에 할 말이 많은 영화다. 미국의 한 비평가는 이 작품을 두고 “저항하는 쪽이 오히려 유치해 보일 만큼 뻔뻔하다”고 평한 바 있다. 그 뻔뻔함은 동화의 공식에 대한 과감한 복원에서 나온다. 할리우드는 성노동을 무균화하고, 사적…
- 「미녀와 야수」
마을이 곧 야수다
미국의 한 영화 전문지는 《미녀와 야수》를 두고 “애니메이션이 뮤지컬 영화 예술의 정점에 닿은 작품”이라고 썼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쁜 그림과 노래 부르는 식기들을 ‘명작’이라 부르는 어른들이 유난스럽게만 보였다. 이 영화의 진짜 얼굴은 미녀와 야수의 결말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내야 했던 마을에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 「아메리칸 뷰티」
미국 잔디밭의 위선, 한국 베란다의 조화
지난주, 어릴 적 살던 동네 골목을 지나다가 이웃집 화분에 꽂힌 플라스틱 장미를 보았다. 햇빛에 바래지도 않고 비에 썩지도 않는 그 꽃은 어쩌면 그 골목에서 가장 완벽한 풍경이었다. 문득 샘 멘데스 감독의 데뷔작 ‘아메리칸 뷰티’가 떠올랐다. 해외의 한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미국 교외 생활에 대한 어둡고 우아한 해부”라고 불렀다. 그 문장이…
- 「투모로우」
투모로우, 기후는 망하고 흥행은 산다
이 영화는 기후를 구원하려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재난을 파는 장사다. 한 미국 영화 전문지는 “오존층만큼 얇은 인간 드라마”라고 비웃었지만, 그 비웃음마저 이 영화에겐 홍보 문구로 쓰인다. 롤랜드 에머리히는 백악관을 날리고 고질라로 맨해튼을 밟은 연출자다. 이번에는 인류가 자초한 기후변화를 카테고리 5 허리케인의 섬세함으로 다룬다. 뉴욕 한복판으로…
- 「데드풀 2」
착한 놈 코스프레가 제일 재미… 속엔 지질한 상처
1. 슈퍼히어로라는 게 그렇다. 사회학 졸업생이 서울 전세 대신 고담시의 부동산을 걱정하고, 정의감만큼은 사법고시 합격자 뺨치게 투철한 선량한 시민이 낮에는 재벌 3세, 밤에는 박쥐 탈을 쓴다. 그런데 웨이드 윌슨은 다르다. 남의 집 담장은커녕 자기 인생의 통장 잔고도 신경 안 쓴다. 그가 신경 쓰는 건 오직 하나, 관객이 지금 이 화면을 얼마나 우습게…
- 「아이언 렁」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영화가 가장 무섭다 — 아이언 렁
'아이언 렁'은 철저히 실패할 영화다. 러닝타임 내내 잠수함 내부만 보여주고, 괴물이 튀어나오지 않으며, 왜 별이 사라졌는지도 끝내 설명하지 않는다. 팝콘을 씹으며 볼 영화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버라이어티》의 피터 드브루지가 "철학적 뼈대만 남은 호러"라고 평한 이 영화가, 왜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가.
- 「꿀벌 대소동」
꿀벌의 소송, 우리의 일자리 — 꿀벌 대소동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육각형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벌집이다. 노란 졸업가운을 입은 벌들이 일제히 사각모자를 공중으로 던진다. 환호 대신 윙윙거림. 카메라가 한 마리의 벌을 따라가자 거대한 꿀 공장이 펼쳐진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꿀이 쏟아지고, 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평생 한 가지 일만 한다. 신입 벌 배리 비 벤슨의 눈이 공허하게 빛난다. "이게…
- 「My Fault: London」
도미닉 산타마리아 감독께 — My Fault: London
《가디언》의 벤자민 리는 'My Fault: London'을 두고 "컴포트 푸드 시네마"라 불렀습니다. 정확한 진단이에요. 당신의 영화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내놓는 맥앤치즈와 같습니다. 재료는 상급이고, 조리법은 정밀하며, 맛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 「시네마 천국」
검열된 입술의 축복 — 시네마 천국
'시네마 천국'은 관객을 울리려고 작정한 영화다. 이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거나, 아직 이 영화를 안 본 사람이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선율이 불어닥치면 심장은 감독의 지휘봉 아래 놓이고, 스크린 위 시칠리아의 먼지 낀 햇살은 보는 이의 기억 속 어딘가를 건드린다. 영국의 한 영화 평론가이 영화를 두고 "시네필들이 팝콘에 눈물을…
- 「인생은 아름다워」
거짓말이 아이를 살린다 — 인생은 아름다워
1. 어릴 적 할머니는 내게 종종 거짓말을 하셨다. 6·25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먼 나라에 일하러 가셨다"고. 나는 한참 뒤에야 그 '먼 나라'가 어디인지 알았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며 할머니의 그 어눌한 거짓말이 떠올랐다.
- 「만달로리안과 그로구」
투구 속의 아버지 — 만달로리안과 그로구
지난해 미국 갤럽이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 남성의 57%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을 안고 산다. 딘 자린이라는 사내가 관객의 심금을 건드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페드로 파스칼은 투구 안에서 목소리와 몸짓만으로 연기한다. 은닉(隱匿)과 현현(顯現)의 역설. 얼굴을 감출수록 내면이…
- 「님포매니악 볼륨 2」
고통의 해부학 — 님포매니악 볼륨 2
어두운 방.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다. 그녀의 등에는 채찍 자국이 선명하다. 붉은 선들이 교차하며 격자를 이룬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살갗 위에 지도를 그려놓은 것 같다. 카메라는 물러서지 않는다. 줌인하지도, 줌아웃하지도 않는다. 그저 바라본다. 의사가 수술대 위 환부를 들여다보듯, 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샬롯 갱스부르의 상처 입은 육체를 응시한다.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세룰리언의 교훈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1] 외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시절, 나는 회사에서 가장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녔다. 패션 따윈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돌이켜보면 그것도 일종의 허세였다. '나는 겉치레에 휘둘리지 않는 본질적인 인간'이라는 자기최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앤디(앤 해서웨이)가 면접장에서 보여주는 바로 그 표정이다. 패션 잡지 편집장 미란다(메릴…
- 「패스트 찰리」
세 청부업자의 의치(義齒) — 패스트 찰리
2023년 북미 박스오피스 10위권 중 8편이 슈퍼히어로물 혹은 기존 프랜차이즈의 속편이었다. 중간 예산의 성인 범죄 스릴러는 멸종 위기종(種)이다. 필립 노이스 감독의 '패스트 찰리'는 그래서 반갑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직한 장르영화, 익숙하지만 불쾌하지 않은 오락물. 《인디와이어》는 이 영화를 "사라져가는 종(種)"이라 표현했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
-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분홍색 카디건을 입은 괴물 —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①어린 시절 가장 무서웠던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자문해본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괴물? 창문을 두드리는 유령? 아니었다. 진짜 무서웠던 건 웃으면서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는 어른들이었다. 《버라이어티》의 토드 매카시는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을 두고 "제도적 악의가 상냥함으로 포장될 때 관객이 인식하는 공포"라고 썼다. 정확한…
- 「글래디에이터」
검투장의 질문, 광장의 대답 — 글래디에이터
"Are you not entertained(즐겁지 않으냐)?" 피 묻은 검을 든 검투사가 콜로세움의 관중을 향해 포효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0년 작 '글래디에이터' 속 이 장면을 두고 영국 영국의 한 영화 평론가는 '불편한 자기 반영'이라 지적했다. 로마인들의 피에 대한 갈증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정교하게 연출된 살육으로 관객을…
- 「고트」
형제의 집 — 고트
1. 어둠 속에서 주먹이 날아든다. 대학 신입생 브래드(벤 슈네처)는 밤길에서 정체불명의 남자들에게 폭행당한다. 영화 '고트'는 이 장면으로 시작한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 땅바닥에 쓰러진 몸. 카메라는 외면하지 않는다. 브래드는 살아남았지만 무언가가 부서졌다. 그가 찾아간 곳은 형 브렛(닉 조나스)이 속한 대학 사교클럽, 프래터니티다.
- 「7인의 사무라이」
이긴 자가 지는 법 — 7인의 사무라이
영국 비평지 영국의 한 영화 평론가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1954) 결말을 이렇게 요약했다. "사무라이는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다." 207분에 달하는 이 대서사시의 마지막 장면은 기묘하다. 빗속 혈전을 치러낸 생존 사무라이들이 무덤 앞에 서 있고, 그들이 목숨 걸어 지킨 농민들은 이미 모내기 노래를 부르며 일상으로…
- 「시너스」
피를 빨아먹는 것들에 대하여 — 시너스
[1] 어릴 적 외갓집에서 본 흑백TV 속 뱀파이어는 유럽 귀족이었다. 망토를 휘날리며 처녀의 목을 물고, 마늘과 십자가 앞에서 비명을 지르던 그 고전적 괴물. 오랜 타지 생활 끝에 돌아온 한국에서 라이언 쿠글러의 '시너스'를 보며, 나는 뱀파이어라는 존재가 이토록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사실에 멍해졌다. 1930년대 미시시피 델타, 짐 크로 법이…
-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늙은 육체의 반란 —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은 시대착오적인 영화예요. 인공지능이 인간의 행동을 완벽히 예측하고,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력화하는 디지털 전지전능의 시대에 62세 노인이 실제 육체를 던져 세계를 구한다니요. 이것은 구닥다리를 넘어 거의 우스꽝스러워요. 그런데 바로 이 우스꽝스러움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어요.
- 「리얼 스틸」
로봇이 링에 오른 이유 — 리얼 스틸
이 영화는 사기다. 2011년에 개봉한 '리얼 스틸'은 제목부터 관객을 속인다. '진짜 강철'이라니. 정작 이 영화가 팔고 있는 건 강철이 아니라 눈물이다. 로봇 복싱이라는 번쩍이는 미래의 외피(外皮) 아래 숨어 있는 건, 반세기 전 헐리우드가 수백 번 써먹은 그 공식—'아버지의 귀환'과 '약자의 역전극(逆轉劇)'—이다. 숀 레비 감독은 이 점을 숨기려…
- 「슈퍼배드 4」
그루는 왜 피곤해 보이나 — 슈퍼배드 4
몇 년 전 조카를 데리고 극장에 갔다. 《슈퍼배드 4》. 상영 시간 내내 조카는 깔깔댔고,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영화가 끝나자 조카가 물었다. "삼촌, 재밌었어?" 나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응, 미니언들 귀엽더라."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전부도 아니었다.
- 「레이첼 니켈 살인 사건」
벽 너머의 비명, 조용한 정원 — 레이첼 니켈 살인 사건
[1] 1992년 7월, 런던 윔블던 커먼. 화면은 이른 아침의 공원을 비춘다. 한 여자가 두 살 아들의 손을 잡고 산책한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바람에 풀잎이 흔들린다. 목가적(牧歌的) 풍경이다. 그리고 갑자기, 영화는 그 평화를 조각낸다. ITV의 〈레이첼 니켈 살인 사건〉은 이렇게 시작한다. 23세 레이첼 니켈이 백주에 살해당하고, 그…
- 「핑크 플로이드 더 월」
벽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 — 핑크 플로이드 더 월
이 영화는 보는 이를 거부한다. 앨런 파커의 '핑크 플로이드 더 월'(1982)은 95분간 관객을 환대하지 않고,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으며, 심지어 대사조차 거의 주지 않는다. 록스타 핑크의 정신 붕괴를 다룬다지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서사가 아니라 시청각적 폭격이다. 영국의 비평가 필립 스트릭이 영국의 한 영화지에서 "논의하기엔 흥미롭지만…
- 「8번 출구」
출구가 없는 사람들 — 8번 출구
1 미국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얼리치는 이 영화를 두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의 공포, 그리고 기울이지 못하는 것의 더 큰 공포"라고 썼다. 인디 게임 개발자 코타게가 만든 바이럴 게임 '8번 출구'를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은 형광등 아래 무한 반복되는 지하철 통로를 배경으로 한다. 이름 없는 샐러리맨이 끝없이 같은 복도를 걷는다. 탈출 조건은 단…
- 「할복」
제도의 칼날, 개인의 살점 — 할복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 일은, 결국 형식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묻는 일과 같을지도 모르겠어요.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1962년작 '할복'은 그 물음에 대한 가장 냉혹한 답변 중 하나예요. 사무라이 시대극의 외피를 두른 이 작품은, 실상 권위와 체면이 개인을 어떻게 갈아 넣는지를 집요하게 기록한 고발장이에요.
- 「이창」
당신은 왜 남의 집 창문을 들여다보는가 — 이창
[1] 카메라가 서서히 열린 창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아파트 안마당. 한여름의 열기가 사람들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발레리나처럼 몸을 풀어대는 여자, 조각가처럼 화분을 다듬는 노부부, 침대에서 뒤척이는 외로운 중년 여성. 그리고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휠체어에 파묻힌 남자—잡지사 사진기자 제프. 그의 시선이…
-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 편」
전기톱이 그리는 연애의 잔해 —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 편
①화면이 열린다. 소년이 혼자 라면을 먹고 있다. 젓가락질이 느리다. 국물에 비친 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텅 비어 있다. 그 순간 바깥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소년은 처음 보는 표정을 짓는다.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살아 있다는 것만은 확인되는 표정.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 편'은 그렇게 시작된다.
- 「백 투 더 퓨처」
년산 낡은 영화에 대한 변명 — 백 투 더 퓨처
40년 전 영화를 지금 와서 칭찬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에요. 마치 할아버지 앨범을 뒤적이다가 "와, 젊었을 때 잘생기셨네요"라고 말하는 손주처럼 말이에요. '백 투 더 퓨처'가 명작이라는 사실을 2025년에 새삼 지적하는 건, 기자 생활 수십 년에 이보다 더 궁색한 꼴이 없어요. 하지만 궁색함을 무릅쓰고 이 글을 씁니다.
- 「피아니스트」
생존의 윤리학 — 피아니스트
[1]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60% 이상이 증언을 거부했다는 통계가 있다. 말해봤자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는 그 침묵의 언어로 쓰인 영화다. 크라쿠프 게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머니를 아우슈비츠에서 잃은 폴란스키가, 60대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꺼낸 증언. 《버라이어티》의 토드 매카시는 이 영화를 "생존 그…
- 「애프터 3」
애프터 3: 독(毒)을 사랑이라 부르는 시대의 자화상
'애프터 3'는 실패한 영화다. 흥행이 아니라 윤리에서.
- 「라이온 킹」
왕위는 피로 흐른다 — 라이온 킹
붉은 태양이 아프리카 지평선 위로 솟아오른다. 코끼리 무리가 먼지를 일으키며 행진하고, 얼룩말과 기린이 프라이드 락을 향해 모여든다. 비비 원숭이 라피키가 갓 태어난 사자를 절벽 끝에서 치켜드는 순간, 동물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장엄하다고 불리는 '서클 오브 라이프' 시퀀스다. 이 장면을 처음 본 뒤 나는 불쾌했다.…
- 「이터널 선샤인」
지우고 싶은 것들 — 이터널 선샤인
지난주 오래된 휴대전화 백업 파일을 정리하다 2016년의 카카오톡 대화창을 열었다. 8년 전 나와 결별한 사람과의 대화였다. 새벽 세 시에 "잘 자"로 끝난 마지막 문장 뒤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 대화창을 삭제하지 못하고 다시 폴더를 닫았다. 지워버리면 홀가분해질 것 같으면서도, 지우는 순간 그때의 내가 함께 사라질 것 같았다.
-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마스크는 누구의 것인가 —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영국 한 영국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애니메이션 영화의 문법을 진짜로 진전시킨 작품"이라 썼다. 과장이 아니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슈퍼히어로 장르가 10년 넘게 시장을 포화시킨 뒤에도 '진정한 놀라움'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화면 한 장 한 장이 벤데이 도트로 뒤덮인 살아 있는 만화책이고, 색판이 의도적으로 어긋나…
-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환영(幻影)을 파는 시대의 영웅 —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제이크 질렌홀은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촬영 당시 "이 영화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다고 한다. 배우 본인조차 자기 캐릭터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연기했다는 이 일화는, 그가 연기한 '미스테리오'라는 악당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다.
- 「좋은 친구들」
트렁크 속 괴성, 그리고 우리 — 좋은 친구들
한밤의 고속도로. 차 트렁크에서 둔탁한 쿵쿵 소리가 새어나온다. 세 남자가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자, 피투성이 사내가 손을 뻗는다. 칼이 내리꽂히고, 총성이 울린다. 화면이 정지되며 내레이션이 흐른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난 늘 갱스터가 되고 싶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좋은 친구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 「더 보이즈」
슈퍼맨이 사이코패스라면 — 더 보이즈
어릴 적 나는 슈퍼맨을 진심으로 믿었다. 하늘을 나는 빨간 망토, 총알도 튕겨내는 가슴팍, 그리고 악을 용서하지 않는 정의로움. 그런데 언젠가부터 의문이 싹텄다. 저 남자, 왜 안 늙지? 저렇게 강한 존재가 왜 하필 기자로 위장해 살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가진 자가 과연 '선'을 선택할 이유가 있을까? 아마존의 시리즈 '더 보이즈'는 정확히 그…
- 「F1」
브래드 피트에게 — F1
당신이 61세에 실제 F1 머신을 몰기 위해 수개월간 드라이빙 훈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톰 크루즈가 '탑건: 매버릭'에서 직접 전투기 조종석에 앉았던 것처럼, 당신도 스턴트맨에게 얼굴을 빌려주는 대신 200마일 속도의 공포를 온몸으로 받아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얼리치는 이 영화를 두고 "눈을 현혹하면서 뇌는 중립 기어에…
- 「세븐」
'세븐',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1] 영국 《사이트 앤 사운드》의 에이미 타우빈은 이 영화의 결말을 두고 "관객을 폭력의 공범으로 만든다"고 썼다. 맞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세븐'은 두 시간 동안 우리를 범죄 현장으로 끌고 다니더니, 마지막엔 손에 피를 묻힌 채 극장 밖으로 내보낸다. 우리가 입장료를 내고 이 참혹을 구경하러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듯이.
- 「토이 스토리」
장난감의 불안, 혹은 대체 가능성의 공포 — 토이 스토리
'토이 스토리'는 어린이 영화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어린이만을 위한 영화가 결코 아니다. 《뉴욕 타임스》의 자넷 매슬린은 이 영화를 두고 "우정과 경쟁에 대한 놀랍도록 정교한 이해"라 평했는데,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고 싶다. 이것은 대체 가능성에 대한 공포를 다룬, 성인을 위한 심리극이다.
-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피터 잭슨의 도박** —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이 영화는 실패해야 마땅했다. 뉴질랜드 출신의 B급 호러 감독이 20세기 영문학의 성전(聖典)을 건드리겠다고 나섰을 때, 전 세계 톨킨 신자들의 반응은 분노와 조롱 사이 어딘가였다. 원작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안다. 이 소설을 영상으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도박인지.
- 「기묘한 이야기」
던전의 아이들, 그리고 우리의 잃어버린 지하실 — 기묘한 이야기
1983년 인디애나 주, 어느 교외 주택의 지하실. 형광등 불빛 아래 네 명의 소년이 던전스 앤 드래곤스 보드판을 둘러싸고 앉아 있다. 주사위가 탁자 위를 굴러간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이제 그만 올라와"라고 외치고, 소년들은 자전거를 타고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그중 한 명이 집에 도착하지 못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 「브레이킹 배드」
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브레이킹 배드
영국 《가디언》의 마크 로슨은 이 드라마를 두고 "토니 소프라노는 폭력 속에서 태어났지만, 월터 화이트는 폭력을 선택했다"고 썼다. 그 한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태생과 선택. 이 차이가 왜 그토록 불편한가.
- 「유포리아」
무한 접속의 고독, 네온 아래 쪼그라드는 영혼들 — 유포리아
1. 화면이 번진다. 어린 소녀가 알약을 삼키고, 세상이 처음으로 조용해진다. HBO 드라마 '유포리아'의 주인공 루(젠데이아)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처음으로 평화를 찾았다." 중독에 대한 경고가 아니다. 의식이 견딜 수 없을 때 왜 무의식을 선택하는지, 그 절박한 심리를 해부하는 첫 장면이다.
- 「쇼생크 탈출」
교도소에서 모차르트를 — 쇼생크 탈출
[1] 어릴 적 텔레비전 영화채널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다. 한밤중이었고, 중간부터 봤다. 줄거리도 제대로 모른 채 끝까지 봤다. 다음 날 학교에서 졸았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설명이 안 된다. 팀 로빈스가 교도소 스피커로 오페라를 틀고, 죄수들이 운동장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장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만은…
- 「존 오브 인터레스트」
담장 위에서 해바라기를 가꾸는 사람들 — 존 오브 인터레스트
[1] 화면이 까맣다. 3분 동안 까맣다. 미카 레비의 전자음향이 마치 거대한 기계가 깨어나는 소리처럼 극장을 채우는 동안, 관객들은 무엇이 보일지 기다린다. 마침내 밝아지는 화면 속에선 아버지와 아이들이 강가에서 피크닉을 즐긴다. 햇살이 좋다. 물이 맑다. 개가 뛰논다. 이윽고 가족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카메라가 뒤따르다 보니 저 담장…
- 「헌팅 시즌」
도망칠 곳이 없다 — 헌팅 시즌
[1] 아르헨티나 황야다. 나무들 사이로 안개가 낮게 깔린다. 중년 남자가 딸에게 덫 놓는 법을 가르친다. 손놀림이 느리고 정확하다. 딸은 지루한 표정이다. 세상과 단절한 아버지, 세상이 궁금한 딸. 둘의 평화는 피 묻은 여자가 숲에서 기어 나오는 순간 산산이 부서진다. 클라우디오 보이비안 감독의 '헌팅 시즌'은 이렇게 시작한다.
- 「데드풀과 울버린」
망가진 영웅들의 시대 — 데드풀과 울버린
1. 라이언 레이놀즈가 양복 차림으로 중고차 세일장에 서 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 화려한 빨간 슈트는 옷장 깊숙이 처박혀 있고, 입에서는 "이 차 정말 좋습니다, 전 오너가 할머니였어요"라는 딜러 특유의 거짓말이 줄줄 흘러나온다. 영화 '데드풀과 울버린'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웅의 시대가 끝났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영웅이 필요…
- 「그린 마일」
기적을 목격한 자의 의무 — 그린 마일
[1] 3시간 9분.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그린 마일'(1999)이 요구하는 시간이에요. 1935년 루이지애나주 콜드마운틴 교도소 사형수 감방, 그 좁고 눅눅한 복도를 오가는 간수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데 필요한 인내의 양이죠. 요즘 같은 숏폼 전성시대에 관객에게 이 정도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려면 얼마나 도발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까요? 이 영화의…
- 「8번 출구」
출구가 없는 사람들 — 8번 출구
1 미국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얼리치는 이 영화를 두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의 공포, 그리고 기울이지 못하는 것의 더 큰 공포"라고 썼다. 인디 게임 개발자 코타게가 만든 바이럴 게임 '8번 출구'를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은 형광등 아래 무한 반복되는 지하철 통로를 배경으로 한다. 이름 없는 샐러리맨이 끝없이 같은 복도를 걷는다. 탈출 조건은 단…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효율의 손가락, 칼질의 시대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미국 《버라이어티》의 오언 글라이버먼은 타노스를 두고 "비극적 위엄(tragic grandeur)"이라는 표현을 썼다. 우주 생명체 절반을 소멸시키겠다는 광기 어린 목표를 품은 보랏빛 괴물에게 '비극'이라니. 그러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끝까지 보고 나면 그 수사가 과장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세요. 조시 브롤린이 연기한 이 디지털 거인은…
-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호그와트의 밀폐된 공기 —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어릴 적 나는 백과사전을 통째로 영화화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ㄱ부터 ㅎ까지, 가나다순으로 세상 모든 항목이 영상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기획. 당연히 그런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질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을 담으려는 욕심은 아무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의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 「모탈 컴뱃」
착공식의 미학 — 모탈 컴뱃
눈이 내린다. 17세기 일본, 대나무 숲 사이로 한 무사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다. 카메라는 느긋하게 그 정경을 훑는다. 그리고 서리가 창문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찬 기운이 이상하다 싶은 순간, 푸른 갑옷의 사내가 나타나 순식간에 가족을 도륙한다. 피가 땅에 닿기 전에 얼어붙는다. 무사는 정원 도구로 맞서 싸우다 결국…
- 「패스트 라이브즈」
호수 위에 뜬 달을 건지려는 사람들에게 — 패스트 라이브즈
[1]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미국 내 한국계 이민자 수는 약 190만 명이에요. 그중 상당수는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건너가 한국어와 영어 사이에서 자아를 두 번 구축한 사람들이죠.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는 바로 그 틈새에서 태어난 영화예요. 서울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캐나다로 이주한 나영(노라)이라는 여자가…
- 「아임 스틸 히어」
아임 스틸 히어,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1] 월터 살레스의 「아임 스틸 히어」는 137분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만들어 놓고, 극장을 나선 뒤에야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내가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좀 불쾌한 일이다.
- 「추락의 해부」
'추락의 해부' — 법정이 심판할 수 없는 것
[1] 프랑스 알프스 산장. 인터뷰를 마친 여자 작가가 2층에서 창밖을 본다. 그녀의 남편 시체가 눈밭에 엎어져 있다. 피가 하얀 눈 위에 번진다. 개가 짖고, 시각장애인 아들이 지팡이를 짚으며 현관으로 나선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추락의 해부'는 이렇게 시작해요. 남편은 추락했는가, 추락당했는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긴 이…
- 「프로젝트 헤일메리」
협력은 인간의 일이 아니다 — 프로젝트 헤일메리
「프로젝트 헤일메리」(2026)는 한 가지를 묻는다. 협력은 정말 인간의 본성인가, 아니면 인간이 가장 못하는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