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미야자키 하야오는 실패했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 (Kimitachi wa Dō Ikiru ka)) ·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 202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 이미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 이미지 © TMDb

1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는 실패작이다. 적어도 그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는. 여든을 넘긴 노인이 「바람이 분다」(2013)로 이미 완벽한 유서를 써 놓고서 다시 책상 앞에 앉은 이유는, 제 죽음을 제 손으로 통제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통제되지 않는다. 노인은 자신의 카논에서 가장 값비싼 조각들—센과 치히로의 미궁, 토토로의 시골, 하울의 비행하는 성—을 하나하나 꺼내 다시 이어 붙였다. 그 결과물은 자기 신화의 카탈로그처럼 보이고, 그래서 아름답지만, 그래서 아쉽다. 노인이 사랑했던 것들은 죽지 않았다. 죽지 못했다고 해야 옳다. 이 영화의 실패는 바로 거기에 있다. 영국의 한 비평가(피터 브래드쇼)는 이 영화가 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미룬다고 썼다. 나는 거기에 덧붙인다. 질문을 미룬 것이 아니라, 질문을 회피(回避)한 것이다.

2

영화는 도쿄 공습의 화염 속에서 어머니를 잃은 소년 마히토가 시골 저택으로 이주해 새어머니와 어색하게 살아가다가, 회색 왜가리에게 이끌려 낡은 탑 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정을 그린다. 이 설정은 미야자키의 자전(自傳)을 거의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감독의 아버지는 실제로 군용기 부품을 만들었고, 어린 미야자키는 전쟁의 기억과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았다. 그가 마히토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한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투영이 어떤 윤리적 지점에서 멈추는가이다. 탑 깊숙이 자리한 종조부 노인은 균형석을 쌓아 세계를 유지하려 한다. 셰익스피어의 프로스페로처럼, 혹은 미야자키 자신처럼. 그러나 그 세계는 이미 기울어져 있다. 누군가 뒤를 이어야 한다. 종조부는 마히토에게 그 책임을 넘기려 하지만, 소년은 거부하고 현실로 돌아간다. 여기서 영화는 갑자기 멈춘다. 마치 노인이 자신의 은퇴를 다시 한 번 번복하듯, 영화도 결론을 유예(猶豫)한다. 꿈속에서 책임이 시작된다는 주제는 끝까지 응결되지 못한다. 회색 왜가리가 어머니가 살아 있다고 속삭이는 순간, 이 영화는 모험 판타지에서 슬픔의 인류학으로 미끄러진다. 그러나 그 슬픔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탑과 함께 무너진다.

3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보고 세 번째를 망설이고 있다. 실패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어쩌면 이 실패야말로 미야자키의 유산일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세운 왕국의 폐허 위에 올라서서, 그 폐허마저 후계자에게 넘기려 한다. 폐허(廢墟)를 물려받을 수 있는가. 그것이 이 영화가 던지는 진짜 질문이다. 「바람이 분다」가 자신을 들여다보다 베인 자국이었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자신을 천천히 지워 내려는 작업이다. 그래서 한 발 더 차갑고, 한 발 더 평온하다. 당신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아니,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당신은 무엇을 지울 것인가. 노인이 남긴 질문은 관객에게 되돌아온다. 평론가인 나도 그 질문 앞에서 무력하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실패한 유서는 완성된 유서보다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