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봉준호의 가장 멍청한 영화 — 미키 17

「미키 17」 (Mickey 17) · 봉준호 (Bong Joon-ho) · 2025

미키 17 (2025) 이미지
「미키 17」 (2025) 이미지 © TMDb

「미키 17」은 봉준호의 가장 멍청한 영화다.

이 문장을 곱씹어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드러난다. 봉준호는 「설국열차」에서 계급을, 「옥자」에서 육식 산업을, 「기생충」에서 한국 사회의 위아래를 해부했다. 그의 풍자는 늘 날카롭고 복잡했으며, 관객에게 단순한 답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우주 식민지를 배경으로, 빨간 모자를 쓴 독재자가 광신도 무리를 거느리고 등장한다.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마셜이라는 이름의 이 인물은, 누가 봐도 어떤 전직 미국 대통령의 캐리커처다. 토니 콜레트가 연기한 그의 부인까지 합세하면 영화는 거의 SNL 단막극 수준으로 비대해진다. 봉준호 특유의 양가적 우화 구조가 어디로 갔는지 묻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무게중심은 풍자에 있지 않다. 로버트 패틴슨이 1인 2역으로 연기하는 두 명의 미키, 거기에 있다. 17번 미키는 열일곱 번 죽었다가 새 몸으로 깨어나는 ‘소모품 노동자’다. 그의 직업은 죽는 것이다. 식민지의 위험한 임무를 대신하고, 죽고, 복제되고, 다시 투입된다. 이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도발적인 컨셉이지만,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 날 17번이 죽기 전에 18번이 깨어난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만 다른 몸, 다른 경험을 가진 두 사람이 욕실에서 마주친다. 이 순간 영화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동일인이 두 명 존재할 때 어느 쪽이 진짜인가.

패틴슨의 연기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명쾌한 대답이다. 17번은 어눌한 발음과 졸린 듯한 눈빛으로 즉각적인 연민을 끌어낸다. 「더 배트맨」에서 구축한 멜랑콜릭한 스타 이미지를 통째로 비틀어, 일부러 멍청하고 비루한 인물을 자처하는 광대가 되었다. 18번은 다르다. 충동적이고 분노하며, 같은 얼굴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튀어나온 것 같다. 두 인물이 동일 인물의 두 인격이 아니라 각각 독립된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점이야말로 이 영화를 작동시키는 동력이다.

봉준호의 이전 영화들은 시스템에 대한 분노로 추진되었다. 자본주의, 계급, 생태. 거대한 구조가 개인을 짓밟는 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그런데 「미키 17」은 처음으로 그 짓밟히는 개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미키의 죽음은 직업이기 때문에 식민지 누구도 두 번 생각하지 않는다. 그 비극을 너무도 일상적으로 다루는 사회 자체에서 코미디가 솟아난다. 봉준호 특유의 톤 믹싱, 슬랩스틱과 비극이 한 컷 안에서 공존하는 결이 여전히 살아 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이야기가 필요 이상으로 우회하고, 토착 외계 생물 ‘크리퍼’에 대한 식민지의 폭력이라는 또 다른 축은 마지막에야 정치적 무게를 얻는다. 풍자의 노골성이 봉준호 특유의 모호한 결을 헐겁게 만든다는 지적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어수룩함이 이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거대 예산 안에서 끝까지 작은 이야기를 지키는 뚝심. 우주 식민지 SF의 외피 아래, 본질은 멍청하고 사랑스러운 패배자들의 작은 우정극이다.

영화의 마지막, 두 미키는 함께 살아남는 법을 모색한다. 죽는 것이 직업이었던 사람이 처음으로 살기로 결심하는 순간. “나는 열일곱 번 죽었지만, 이번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