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어둠을 응시하게 만드는 방법 — 노스페라투

「노스페라투」 (Nosferatu) · Robert Eggers (로버트 에거스) · 2024

노스페라투 (2024) 이미지
「노스페라투」 (2024) 이미지 © T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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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다고 생각한 영화의 목록은 일관성이 없다. 싫다고 단정한 영화에서 종종 좋은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를 평가할 때 나는 질문을 바꾸는 쪽을 택한다. 이 영화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얻었는가.

로버트 에거스의 「노스페라투」(2024)를 보고 나서 나는 그 질문에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 영화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해 보였다. 1922년 무르나우의 무성영화를 다시 만드는 것. 하지만 그 ‘다시’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모호해졌다. 복원인가, 해석인가, 아니면 헌사인가. 혹은 세 가지 모두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나는 에거스의 영화를 좋아한다. 「위치」(2015)는 청교도 가정의 붕괴를 마녀 신화에 접목해 긴장감을 끌어올렸고, 「라이트하우스」(2019)는 두 남자를 등대에 가둬 놓고 광기의 무게를 재는 실험이었다. 「노스맨」(2022)은 바이킹 복수극의 의례성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다. 세 작품 모두에서 에거스는 과거의 어떤 시대와 장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기보다 그 시대 안으로 직접 들어가 살아보겠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노스페라투」에서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이번에는 그 대상이 특정 시대나 문화가 아니라 하나의 영화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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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영화의 계보는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로부터 시작한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무단으로 각색한 이 영화는 저작권 문제로 파기 명령까지 받았지만 살아남았고, 이후 등장하는 모든 흡혈귀 이미지의 원형이 되었다. 막스 슈렉이 연기한 올로크 백작의 쥐 같은 얼굴, 길게 뻗은 손가락, 그리고 벽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영화사에서 가장 즉각적인 시각적 충격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에거스는 이 이미지를 가져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가져오되 그대로 두지 않는다. 빌 스카스가드가 연기한 올로크는 슈렉의 쥐 얼굴과 닮지 않았고, 1979년 베르너 헤어초크 버전에서 클라우스 킨스키가 보여준 창백한 귀족의 인상과도 거리가 있다. 두꺼운 분장 아래의 스카스가드는 동유럽 어딘가에서 몇 세기째 부패 중인 시체에 가깝다. 그리고 에거스는 이 새로운 디자인을 영화 전반에 걸쳐 숨긴다. 그림자와 실루엣 뒤로 물리고, 관객이 그 외형을 명확히 인지하기까지 의도적으로 시간을 끈다.

이것은 무르나우의 전략과 정반대다. 1922년 영화에서 올로크는 등장하는 순간 화면 중앙에 선다. 그의 위협은 단 한 컷만으로 각인되었다. 에거스의 절제는 다른 종류의 효과를 노린다. 흡혈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흡혈귀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어둠 그 자체를 응시하게 만드는 것.

문제는 이 전략이 양날의 검이라는 점이다. 고전이 가졌던 즉각적 충격을 일정 부분 희생하는 대가로 새로운 종류의 긴장을 얻는다. 그 교환이 성공적인지는 관객마다 다르게 느낄 것이다. 나는 그 긴장을 느꼈지만, 동시에 화면 한가운데 당당히 서 있는 괴물의 부재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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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거스가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도박을 건 것은 올로크의 디자인이 아니라 엘렌의 캐릭터다. 릴리-로즈 뎁이 연기한 엘렌 후터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다. 어린 시절 어느 밤 무심코 올로크를 불렀고, 그 이후로 평생 자신의 어두운 반쪽과 싸워왔다. 융 심리학의 ‘그림자’ 개념을 알고 있다면 이 설정이 무엇을 겨냥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올로크는 외부에서 침입한 괴물이 아니라 엘렌이 봉인해 둔 자기 자신의 욕망이며, 둘의 관계는 가해와 피해보다 봉인과 귀환의 구조로 작동한다.

뎁의 연기는 이 설정을 신체로 표현한다. 발작과 환각, 땀과 경련. 그녀의 끊임없이 크게 뜬 눈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두 개의 자아의 충돌을 가시화한다. 이것이 과하게 멜로드라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일부 비평가들은 그렇게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과잉이 영화의 톤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에거스가 직접 이 영화의 정체성을 두고 언급했다는 표현이 있다. 머천트 아이보리가 해머 호러를 만들면 이렇게 될 것이라고. 19세기 살롱 드라마의 정중한 호흡이 한순간 고전적 영국 호러의 음습한 분위기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이중성. 그 안에서 뎁의 멜로드라마적 신체는 오히려 필요한 것이었다.

스카스가드와 뎁이 함께 있는 장면들은 영화의 전기적 중심이다. 혐오와 갈망이 같은 호흡 안에서 충돌한다. 폭력과 관능이 따로 놀지 않고 같은 프레임 안에서 경련하듯 결합한다. 침대 시트 위에서 벌어지는 땀과 욕망의 누적량만큼은 영화사 어떤 작품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농담조의 평가가 있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 영화의 후반부가 다소 의례적으로 흐른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설정을 다 벌여놓은 뒤에 결말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이 조금 졸리다. 미학에 너무 많은 주의를 쏟은 대가로 이야기 자체가 느린 페이스에 갇힌 느낌이 있다. 촬영감독 자린 블라슈케의 달빛 아래 풍경은 거의 흑백에 가까운 정도까지 채도가 빠져 있고, 프로덕션 디자인은 한 프레임도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다. 그런데 그 정교함이 때때로 무거운 족쇄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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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거스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이 영화는 그가 줄곧 탐사해 온 청교도적 억압의 계보학을 흡혈귀 신화에 접목한 종합편처럼 보인다. 「위치」에서 시작된 질문—억압된 것은 어떤 형태로 돌아오는가—이 「노스페라투」에서 가장 고전적인 답을 얻는다. 그 답은 흡혈귀다. 사회가 빛 아래로 몰아넣어 봉인해 둔 욕망이 마침내 자신의 형상을 갖추고 돌아오는 것.

1922년 무르나우의 영화는 스페인 독감 직후에 나왔다. 도시 전체에 퍼지는 보이지 않는 죽음을 흡혈귀 신화로 그렸다. 2024년 에거스의 영화는 팬데믹의 그림자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 개봉한다. 같은 신화가 100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공포를 담아낸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조금 기이하다.

나는 이 영화가 좋았다. 하지만 그 ‘좋았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분위기는 압도적이었고, 뎁의 연기는 인상적이었고, 에거스의 고집스러운 미학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데도 영화가 끝난 뒤에 남는 것은 충족감보다 질문에 가깝다. 무르나우의 올로크가 화면 중앙에 섰을 때 관객이 느꼈던 충격과, 에거스의 올로크가 그림자 뒤에 숨었을 때 관객이 느끼는 긴장 중 어느 쪽이 더 깊이 남는 공포인가. 혹은 그 두 가지는 애초에 같은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는 것인가.

어둠을 보여주는 것과 어둠을 응시하게 만드는 것. 에거스는 후자를 택했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아직 대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여러 번 어둠 속을 들여다보았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충족되었는지는—아직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