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호수 위에 뜬 달을 건지려는 사람들에게 — 패스트 라이브즈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 Celine Song (셀린 송) · 2023

패스트 라이브즈 (2023) 이미지
「패스트 라이브즈」 (2023) 이미지 © TMDb

[1]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미국 내 한국계 이민자 수는 약 190만 명이에요. 그중 상당수는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건너가 한국어와 영어 사이에서 자아를 두 번 구축한 사람들이죠.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는 바로 그 틈새에서 태어난 영화예요. 서울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캐나다로 이주한 나영(노라)이라는 여자가 있어요. 스물네 살에 뉴욕으로 다시 옮기고, 서른여섯에 뉴욕에서 첫사랑 해성을 재회해요. 12년 단위로 끊어진 세 개의 시간대를 영화는 무심한 듯 촘촘히 꿰매요. 줄거리를 더 풀어놓는 건 사양할게요. 이 영화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보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를 보는 영화거든요.

[2] 극작가 출신인 송 감독이 대사의 화려함을 자제하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그레타 리와 유태오가 마주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들의 시선이 교차하고 빗나가는 미세한 각도를 포착해요. 침묵이 대사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들이죠. ‘인연’이라는 한국어 단어가 영화 안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데, 송 감독은 그것을 신비주의적 운명론으로 소비하지 않아요. 오히려 해성이 노라에게 ‘인연인가 봐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살짝 어색한 작업 멘트처럼 들리기도 해요. 촬영감독 셰이비어 커크너의 35mm 화면은 새벽과 황혼의 영상통화 장면에서 어슴푸레한 빛을, 노라가 미래의 남편 아서를 만나는 낮 장면에서 눈부신 빛을 대비시켜요. 빛이 두 남자, 두 시간대, 두 자아를 가르는 경계선처럼 작동하는 거죠.

[3]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요즘 한국 사회의 ‘고향’ 담론을 떠올렸어요. 지방 출신이 서울로, 서울 출신이 해외로, 해외 이민자가 다시 한국으로—우리는 끊임없이 떠나고, 떠난 곳을 그리워하고, 그러면서도 돌아갈 생각은 별로 없는 사람들이에요. 노라의 어머니가 “무언가를 두고 떠나면, 그만큼 새로 얻는 것도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이 대사는 이민자만의 철학이 아니에요.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새 뿌리를 내리려는 모든 사람의 자기 위안이자 자기 설득이죠. 저 역시 타지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 감정을 잘 알아요. 고향은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장소가 되어버리거든요. (제가 좀 감상적으로 흘렀네요. 칼럼 쓰다가 자기 얘기 하는 건 좀 민망한 일이긴 해요.)

[4] 영화 마지막, 노라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우리는 모두 몇 개의 평행우주를 품고 사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가지 않은 길, 선택하지 않은 사람, 말하지 못한 말들. 그것들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쌓여간다는 감각. 요즘 한국 정치판에서는 ‘인연’이라는 단어가 좀 다르게 쓰이죠. 지연, 학연, 혈연—죄다 ‘연’자 돌림이에요. 거기서 ‘인연’은 운명이 아니라 계산이고, 그리움이 아니라 거래예요. 「패스트 라이브즈」가 묻는 인연은 그런 게 아니에요.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들의 무게, 호수 위에 뜬 달그림자를 건지려다 빠져버릴 것 같은 그 아찔함. 이 영화는 달을 건지지 않아요. 그냥 달을 바라봐요. 그게 사랑이에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