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손가락을 자르는 남자, 대화를 포기하는 우리 — 이니셰린의 밴시
「이니셰린의 밴시」 (The Banshees of Inisherin) · 마틴 맥도나 (Martin McDonagh) · 2022
어느 봄날의 절교
지난봄, 오랜 벗과 연락이 끊겼다. 다툰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그가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다음 날도, 그다음 주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를 묻는 메시지에 그는 딱 한 줄만 남겼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한동안 그 문장을 들여다보았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는 내내 그 메시지가 떠올랐다.
섬과 내전, 닮은꼴의 거리
영화의 무대는 1923년 아일랜드 서해안의 가상 섬 이니셰린이다. 본토에서는 내전의 포성이 울리지만, 섬사람들에게 그것은 바다 건너 먼 일처럼 들린다. 감독 마틴 맥도나는 이 배경을 정치적 알레고리로만 쓰지 않는다. 포성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멀리서만 들릴 뿐이고, 정작 스크린 안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개인이다. 콤(브렌든 글리슨)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던지는 장면은 내전의 축소판이라기보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기묘한 폭력의 한 형태다. 대화를 거부하는 자가 자해로써 상대를 협박하는 구도. 이것은 역사책에서 본 적 없는 종류의 전쟁이다.
친절함의 무게
맥도나의 전작들, 특히 미국을 무대로 한 「세븐 사이코패스」나 「쓰리 빌보드」에는 플롯의 과잉이 있었다. 사건이 사건을 부르고, 대사가 대사를 덮었다. 「이니셰린」은 다르다. 12년 남짓 남았다고 짐작되는 자기 생애를 빌미로, 콤은 어느 날 갑자기 친구 파드릭(콜린 패럴)에게 절교(決裂)를 선언한다. 파드릭은 묻는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콤의 대답은 냉정하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네가 지루하다.
파드릭이 믿는 것은 친절함이다. 사람 사이에 오가는 작은 말들, 술집에서 나누는 가벼운 농담, 그것이 삶을 버틸 만하게 만든다고 그는 생각한다. 콤이 믿는 것은 정반대다. 그런 친절함은 시간 낭비이고, 자기 안에 남길 무언가—예컨대 음악—를 위해서라면 인간관계 따위는 잘라 내야 한다. 두 사람의 충돌은 단순한 성격 차이가 아니다. 예술과 일상, 자기보존과 호의 사이의 가치관 싸움이다.
신체로 말하는 배우들
콜린 패럴의 눈썹은 이 영화에서 가장 웅변적인 기관이다. 걱정에 잠긴 소년의 표정으로 시작해, 점차 분노와 무너짐 사이를 오간다. 그가 처음으로 상대에게 고함을 지르는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나오는데, 그때까지 축적된 감정의 압력이 그 한 마디에 실려 터져 나온다. 브렌든 글리슨은 등이 굽은 채 피들을 켜는 남자로, 오래전에 세상을 응시하기를 그만둔 사람의 자세를 보여 준다. 두 배우는 2008년 「인 브뤼헤」에서도 짝을 이뤘지만, 이번에는 그때보다 훨씬 깊은 음역에 도달했다.
케리 콘던이 연기한 누이 시오반은 섬을 떠나려는 여자다. 그녀는 오빠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가장 큰 상처를 떠안는 인물이 된다. 배리 케오언이 연기한 마을 외톨이 도미닉은 얼핏 해학적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 가장 쓸쓸한 결말을 맞는다. 이 영화의 윤리적 시야는 두 남자의 자존심 싸움에 있지 않다. 그 싸움이 무심코 짓밟는 주변부 인물들의 풍경에 있다.
아름다운 것은 위로하지 않는다
카터 버웰의 음악은 하프와 글로켄슈필로 동화적 음색을 연출한다. 골웨이 만의 풍경은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위로가 아니다. 자연은 인간의 비극에 무심하고, 음악은 그 무심함을 더 두드러지게 만든다. 맥도나는 이 조합을 통해 코미디와 비극 사이를 오가되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톤을 유지한다. 비극희극이라는 고전적 양식의 무게중심이 여기서 다시 소환된다.
우리는 어디까지 빚지고 있는가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 어디까지 빚지고 있는가. 친절함을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는가. 대화를 계속해야 할 책임이 있는가. 콤은 그런 의무와 책임을 일방적으로 파기했고, 파드릭은 그 파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둘 다 자기 방식대로 정당하다고 믿었다.
지난봄 나에게 절교를 선언한 친구는 아직도 연락이 없다. 나는 그의 손가락이 무사한지 알지 못한다. 영화가 끝난 뒤, 나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보내지 않았다. 보낸다고 해서 돌아올 말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정이 끝나는 방식은 사랑이 끝나는 방식과 얼마나 다를까. 아니, 정말 다르기는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