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콘크리트의 무게, 견딤의 무게 — 더 브루탈리스트

「더 브루탈리스트」 (The Brutalist) · Brady Corbet (브래디 코베이) · 2024

더 브루탈리스트 (2024) 이미지
「더 브루탈리스트」 (2024) 이미지 © TMDb

지난주 청담동 어딘가에서 오래된 노출 콘크리트 건물을 보았다. 벽면의 거푸집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세월에 닳아 군데군데 철근이 드러나 있었다. 한때 그 거친 표면이 실험적이고 전위적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저 낡은 건물이다. 브래디 코베이 감독의 ‘더 브루탈리스트’를 보며 그 건물이 자꾸 떠올랐다.

이 영화는 성공적인 예술가 서사인가. 답은 아니다.

영화는 헝가리 출신 건축가 라슬로 토트(에이드리언 브로디)가 1947년 미국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그가 추구하는 건축은 브루탈리즘이다. 노출 콘크리트의 육중한 덩어리, 가공하지 않은 표면, 구조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미학.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도 동일한 원리를 따른다. 매끈하지 않다. 거칠고 무겁다. 215분의 러닝타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관객 앞에 버티고 선다.

흔히 예술가의 삶을 그린 영화는 천재의 고독과 승리(勝利)를 향한 여정을 따라간다. 아인 랜드의 ‘파운틴헤드’가 그 전형이다. 코베이는 그 틀을 빌려오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라슬로 토트에게 미국은 약속의 땅이 아니다. 부유한 후원자 반 뷰런(가이 피어스)이 등장하지만, 그의 후원은 예술가의 시야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잠식해 간다. 피어스의 연기에서 클라크 게이블이 시민 케인을 연기하는 듯한 기묘한 카리스마가 스친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거대한 공동체 센터는 한 사내의 정신적 골격이 외부 세계로 번역된 도면이지만, 그 완성을 향한 여정은 승리가 아니라 부식(腐蝕)에 가깝다.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는 ‘피아니스트’의 연장선인가. 답은 다르다.

2002년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후 브로디의 커리어는 부침을 겪었다. 그가 다시 유대인 생존자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 두 영화를 연결짓기 쉽다. 그러나 라슬로 토트는 스필만과 다른 종류의 인물이다. 더 둔중하고, 어딘가 머뭇거리는 결이 있다. 두꺼운 헝가리어 억양 속에 묻혀버린 자존심, 신대륙 앞에서 한 차례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사내의 미세한 표정 변화가 영화의 정서적 중력을 결정한다.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견뎌낸다. 그 견딤 자체가 그의 정체성이 되어버린다.

펠리시티 존스가 연기한 아내 에르제베트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다. 위트와 결기를 동시에 갖춘 생존자의 초상이다. 다만 영화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의 건축에 몰두할수록, 사적인 서사는 그 옆에서 왜소해지는 경향이 있다.

형식적 야심이 내용을 압도하는가.

일부 비평가는 코베이가 너무 많은 메타포를 한꺼번에 짊어지려 한다고 지적한다. 유대 정체성, 시오니즘, 이민자의 삶, 자본과 예술의 충돌. 확실히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상징의 과적 상태에 빠지는 듯 보인다. 비스타비전 촬영과 묵직한 사운드 디자인이 만들어내는 위엄은 분명하지만, 그 위엄이 인물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채 외장재로만 머무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카라라 대리석 채석장 시퀀스에서 영화는 순수 영화의 봉우리에 도달한다. 흙먼지와 발자국, 절단음만으로 빚어내는 거의 무성에 가까운 장면. 건축의 진척이 등장인물 사이의 감정선보다 더 강한 드라마투르기를 만들어낸다는 역설이 여기서 가장 선명해진다. 트라우마가 어떻게 문화 내부에서 순환하며 다음 세대의 미학으로 굳어가는지를 추적하는 코베이 특유의 시선이 여기서 가장 명료한 표현을 얻는다.

극중 대사 하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정육면체는 퍼즐이고, 방이며, 감방이다.” 건축가의 도면 속 단순한 도형이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박해의 역사, 예술과 자본의 충돌을 동시에 끌어안는 형상으로 확장된다. 라슬로 토트가 평생 지으려 한 건물, 그리고 그 건물이 결국 그를 가두는 방식에 대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