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담장 위에서 해바라기를 가꾸는 사람들 —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 · 조나단 글레이저 (Jonathan Glazer) · 2024
[1] 화면이 까맣다. 3분 동안 까맣다. 미카 레비의 전자음향이 마치 거대한 기계가 깨어나는 소리처럼 극장을 채우는 동안, 관객들은 무엇이 보일지 기다린다. 마침내 밝아지는 화면 속에선 아버지와 아이들이 강가에서 피크닉을 즐긴다. 햇살이 좋다. 물이 맑다. 개가 뛰논다. 이윽고 가족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카메라가 뒤따르다 보니 저 담장 너머로 굴뚝 하나가 보인다. 굴뚝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 그렇구나. 이 집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령관의 사택이고, 저 연기는 시신 소각장에서 나오는 것이구나. 나는 이 사실을 1분쯤 뒤에야 깨달았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는 그렇게 관객의 눈치 없음을 먼저 확인시킨 뒤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2] 이 영화에 아우슈비츠는 단 1초도 안 나온다. 유대인도, 학살 장면도, 굶주린 몸도, 총구도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담장 이쪽에만 머문다. 아내 헤트비히(잔드라 휠러)가 정원의 해바라기와 라일락을 가꾸고, 아이들이 정원 수영장에서 물장구를 치고, 남편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가 저녁 식사 후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장면만 105분간 계속된다. 단지 저 멀리서, 들릴 듯 말 듯하게 비명과 총성이 바람결에 스쳐 지나갈 뿐이다. 나는 처음엔 이게 저 유명한 ‘악의 평범성’(한나 아렌트)을 시각화한 것이라 생각했다. 절반쯤 맞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갈 무렵, 회스가 밤중에 복도에서 구역질을 하는 장면에서 나는 다른 질문을 품게 되었다. 이 남자는 담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걸까,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걸까, 아니면 너무 잘 알아서 밤마다 토하는 걸까?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냥 토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만 보여준다.
[3] 이 작품을 둘러싼 해외 비평계의 논쟁이 흥미롭다. ‘보여주지 않음’이 윤리적 선택이냐, 아니면 그저 작가주의적 자기과시냐는 쟁점이다. 혹자는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1985) 이후 정립된 원칙—수용소 내부를 허구로 재현하지 않는다—을 글레이저가 정면으로 계승했다고 칭찬한다. 또 다른 혹자는, 그래봤자 ‘악의 평범성’이라는 수십 년 된 통념을 재진술(再陳述)할 뿐 새로운 인식을 길어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비평가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눈치 없는 관객이기도 하니까.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영화가 ‘형식이 곧 윤리적 정당성이냐’라는 물음을 관객에게 떠넘긴다는 사실이다. 가해자의 안온한 정원만 보여주면서 피해자는 소리로만 존재하게 하는 이 전략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담 너머 수백만 명은 영화 속에서 다시 한번 익명화되는 것 아닌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이 영화를 ‘제노사이드 한가운데서 펼쳐지는 소시민 가정극’이라 불렀는데, 나는 이 한 줄에서 칭찬과 비판이 동시에 읽힌다.
[4]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상하게도 한국 정치가 떠올랐다. 누군가의 집 담장 안에서 꽃을 가꾸고 아이를 재우면서,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귀를 닫는 풍경 말이다. 실은 우리 모두가 어떤 담장 안에 살고 있는 것 아닐까. 기후 위기의 징후, 청년 실업의 비명, 소수자들의 절규. 다 들리지만, 정원이 예쁘면 그만이다. 해바라기가 활짝 피었으니 오늘 저녁은 좋은 저녁이다. 영화 속 헤트비히는 친정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아우슈비츠의 여왕이에요.” 그 대사를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담장 안에서 왕관을 쓴 사람들, 여기에도 꽤 많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