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버튼 눈을 거부한 아이, 불완전한 세계를 선택하다 — 코렐라인: 비밀의 문
「코렐라인: 비밀의 문」 (Coraline) · 헨리 셀릭 (Henry Selick)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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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밤마다 읽던 그림책이 있었다. 어머니가 다정하게 읽어주시던 그 이야기 속에는 으레 마녀가 등장했고, 숲이 있었고, 아이가 길을 잃었다. 무서웠지만 덮을 수 없었다. 그 공포가 이상하게 달콤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동화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세상의 어둠을 아이들에게 미리 맛보게 하되,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장치. 헨리 셀릭 감독의 ‘코렐라인: 비밀의 문’은 바로 그 오래된 공식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그 공식이 왜 효과적인지를 다시 증명해 보이는 작품이다.
닐 게이먼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2009년 개봉 당시 최초로 스테레오스코픽 3D로 기획·촬영된 스톱모션 장편이라는 기술적 이정표를 세웠다. 라이카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했고, ‘크리스마스 악몽’과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로 이미 이 분야의 장인임을 입증한 셀릭이 연출을 맡았다. 기술적 성취만으로도 주목할 만하지만, 이 영화가 진정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코렐라인’은 아동용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불편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불편함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뉴욕타임스》의 A.O. 스콧은 이 영화를 두고 “왜 어릴 적 특정 동화들이 악몽을 주었는지 기억나게 하는 작품”이라 평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것은 칭찬이다.” 적확한 표현이다. 좋은 동화는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현실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어둠을 상징화해서 보여주되, 그것을 통과할 수 있다는 희망을 함께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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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익숙하다. 새 집으로 이사 온 열한 살 소녀 코렐라인(다코타 패닝 목소리 연기)은 일에 바쁜 부모에게 무시당한다. 어느 날 벽 속 작은 문을 발견하고, 그 너머 ‘또 다른 세계’로 건너간다. 그곳에는 ‘또 다른 엄마’가 있다.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온전히 코렐라인만을 바라본다. 단 하나, 눈 대신 버튼이 달려 있다는 점만 빼면. 또 다른 세계에 영원히 머물려면 코렐라인 역시 자신의 눈을 버튼으로 바꿔야 한다.
버튼 눈은 단순한 장치가 아니다. 영혼의 포기, 진정한 시각의 상실을 뜻한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아이는 더 이상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된다. 완벽해 보이는 환상 속에 갇혀, 불완전하지만 진짜인 현실로 돌아갈 길을 영영 잃는다. 셀릭은 이 상징을 시각적으로 밀어붙인다. 또 다른 엄마(역시 테리 해처가 목소리 연기)는 처음에는 다정하고 따뜻하지만, 정체가 드러날수록 거미 같은 형상으로 변한다. 손가락이 길어지고, 몸이 마르고, 얼굴이 날카로워진다.
이 변신 장면은 아이들에게 충분히 무섭다. 그러나 셀릭은 이 공포를 저급한 충격 대신 서사적 긴장으로 승화시킨다. 또 다른 엄마가 무서운 이유는 괴물이어서가 아니라, 처음에 그토록 완벽한 엄마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전부 들어주겠다고 하는 존재, 조건 없는 사랑을 약속하는 존재가 실은 가장 큰 위협일 수 있다는 역설. 이것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유효한 통찰이다.
기술적으로 이 영화는 경이롭다. 모든 프레임이 손으로 만들어졌고, 미니어처 세트와 인형의 표정 하나하나에 수천 시간의 노동이 담겼다. 3D는 기믹이 아니라 서사의 일부로 기능한다. 현실 세계는 회색빛에 평면적이고, 또 다른 세계는 과포화된 색채와 깊은 공간감으로 관객을 유혹한다. 그 유혹이 얼마나 달콤한지 관객도 함께 느껴야, 코렐라인이 그것을 거부하는 순간의 무게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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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는 ‘코렐라인’을 두고 “관객을 완전히 신뢰하는 영화”라 썼다. 동의한다. 이 영화는 아이들이 복잡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부모에게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 완벽한 세계에 대한 유혹, 그리고 그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왜 용기인지를.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며, 교훈을 강요하지 않고 경험하게 한다.
조연들—이안 맥셰인이 연기한 러시아 곡예사, 던 프렌치와 제니퍼 손더스가 맡은 은퇴 배우 자매—은 유머를 제공하면서도 서사의 어두운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 브루노 쿨레의 음악은 고딕적 분위기를 완성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코타 패닝은 코렐라인에게 정확한 목소리를 부여한다. 지루해하고, 투덜대고, 고집부리다가, 결국 용기를 내는 열한 살 아이. 달콤하지도 조숙하지도 않은, 믿을 수 있는 어린이.
이 영화는 종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판의 미로’와 함께 거론된다. 세 작품 모두 어린 여자아이가 환상 세계를 통과하며 성장하는 이야기이고, 세 작품 모두 그 환상이 위험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코렐라인’이 도달하는 결론은 다소 다르다.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탈출이나 정복이 아니라, 돌아옴이다. 불완전한 부모, 칙칙한 날씨, 지루한 일상으로. 그리고 그것이 나쁘지 않다는 깨달음으로.
역설적이다. 완벽한 세계를 제시한 뒤 그것을 거부하게 만드는 영화. 환상의 극치를 보여준 뒤 현실의 가치를 말하는 애니메이션. 가장 정교한 기술로 가장 단순한 진실을 전하는 작품. 코렐라인은 버튼 눈을 거부함으로써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선택했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승리였다. 때로 불완전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선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