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망가진 영웅들의 시대 — 데드풀과 울버린

「데드풀과 울버린」 (Deadpool & Wolverine) · 숀 레비 (Shawn Levy) · 2024

데드풀과 울버린 (2024) 이미지
「데드풀과 울버린」 (2024) 이미지 © TMDb

중고차 딜러가 된 슈퍼히어로

  1. 라이언 레이놀즈가 양복 차림으로 중고차 세일장에 서 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 화려한 빨간 슈트는 옷장 깊숙이 처박혀 있고, 입에서는 “이 차 정말 좋습니다, 전 오너가 할머니였어요”라는 딜러 특유의 거짓말이 줄줄 흘러나온다. 영화 ‘데드풀과 울버린’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웅의 시대가 끝났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영웅이 필요 없어졌다. 그래서 히어로는 중고차를 판다. 한때 자신을 필요로 했던 ‘가족’은 흩어졌고, 우주는 데드풀 따위 없어도 잘 굴러간다. 이것이 이 영화가 처음 10분 동안 보여주는 풍경이다.

숀 레비 감독의 이 작품은 디즈니가 마블을 인수한 뒤 처음으로 극장에 건 R등급 영화다. 피가 튀고 욕설이 난무하며 목이 날아간다. 그런데 진짜 과격한 건 폭력이 아니다. 이 영화가 자기 자신을 물어뜯는 방식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거대한 프랜차이즈 기계 안에서, 그 기계의 부품으로 작동하면서, 동시에 그 기계를 조롱하고 해체한다. “우리 다 알잖아, 이거 돈 벌려고 만든 거”라고 관객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영화. 이런 뻔뻔함이 오히려 솔직하게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

죽은 자의 귀환

  1. 휴 잭맨이 돌아왔다. 2017년 ‘로건’에서 그는 완벽하게 죽었다. 딸의 품에서 눈을 감았고, 관객은 울었고, 17년간 이어진 울버린 서사는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7년 만에 되살아났다. 어떻게? 멀티버스라는 마법의 단어 덕분이다. 이번 울버린은 ‘변이체’다. 다른 차원에서 온, 자기 세계의 엑스맨을 지키지 못하고 모두 죽게 만든 실패한 영웅이다. 그래서 돌아온 휴 잭맨의 얼굴에는 ‘로건’의 비장함 대신 패배자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버라이어티》의 오언 글라이버먼은 이 복귀를 두고 “위반적이면서 동시에 전율적”이라고 썼다. 정확한 진단이다. ‘로건’의 결말을 기억하는 관객에게 휴 잭맨의 재등장은 일종의 금기 위반이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행위. 하지만 영화는 이 불편함을 정면으로 껴안는다. “그래, 나 죽었어. 근데 여기 다른 나야. 뭐 어쩔 건데?” 데드풀 특유의 뻔뻔함이 서사적 부채를 가볍게 털어버린다. 이것이 멀티버스라는 설정의 진짜 쓸모다. 무덤을 파헤치는 죄책감 없이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게 해주는 면죄부(免罪符)이자 면피처(免皮處)다.

말 많은 자와 말 없는 자

  1. 이 영화의 진짜 엔진은 두 캐릭터의 충돌이다. 데드풀은 쉬지 않고 떠든다. 제4의 벽을 부수고, 자기가 출연한 영화의 흥행 성적을 언급하고, 라이언 레이놀즈가 망친 ‘그린 랜턴’을 스스로 조롱한다. 반면 울버린은 입을 다문다. 말하고 싶지 않다. 과거를 묻고 싶다. 그런데 옆에서 이 미친놈이 계속 말을 건다. “왜 그렇게 찡그리고 있어?” “좀 웃어봐.” “너 뭐 잘못한 거 있지?”

이 조합은 버디 무비의 고전적 공식을 따르면서도 뭔가 다르다. 보통 말 많은 캐릭터와 과묵한 캐릭터가 만나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우정이 싹튼다. 여기서도 그렇다. 하지만 과정이 난폭하다. 서로를 찢어발기고, 피를 흘리고, 진짜로 죽일 듯이 싸운다. 데드풀의 재생 능력과 울버린의 힐링 팩터가 있기에 가능한 폭력의 무한 반복. 죽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서로를 파괴할 수 있다. 이 기괴한 설정 속에서 두 캐릭터는 역설적으로 서로의 상처를 확인한다. 부서지고 다시 붙는 과정에서 진짜 속내가 튀어나온다.

엠마 코린이 연기한 빌런 카산드라 노바는 텔레파시로 타인의 트라우마를 읽고 그것을 무기로 삼는다. 마블 빌런들이 대체로 그렇듯 이 인물도 주인공들의 여정을 위한 촉매제에 가깝다. 하지만 코린은 제한된 역할 안에서 섬뜩한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차분하고 정중한 목소리로 “네가 왜 실패자인지 말해줄까?”라고 속삭이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카메오의 향연, 그리고 피로

  1. 멀티버스 영화의 운명이 그렇듯, 이 작품에도 카메오가 쏟아진다. 익숙한 얼굴들, 잊힌 캐릭터들, 팬들이 20년간 기다려온 재회들. 어떤 등장은 극장을 폭발시키고, 어떤 등장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가디언》의 벤저민 리는 이 카메오 퍼레이드를 두고 “헌신적인 팬들은 환호하겠지만 모든 레퍼런스를 이해하려면 백과사전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맞는 말이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숙제를 낸다. 2000년대 초반 엑스맨 시리즈를 봤느냐, 폭스가 만든 스핀오프들을 기억하느냐, 마블 코믹스의 계보를 얼마나 꿰고 있느냐.

이것이 현대 블록버스터의 딜레마다. 연속성의 쾌락과 진입장벽의 고통. ‘데드풀과 울버린’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보다는 웃어넘긴다. “몰라도 돼, 어차피 재미있으면 됐지”라는 태도. 어쩌면 이게 정직한 접근일지 모른다. 모든 설정을 이해해야만 감상할 수 있는 영화는 이미 영화가 아니라 시험 문제다. 숀 레비 감독은 속도로 승부한다. 이해 못 한 농담이 있어도 다음 농담이 바로 날아온다. 놓쳐도 괜찮다. 잡을 게 계속 온다.

중반부의 복도 액션 시퀀스는 단연 압권이다. 카메라가 두 주인공 사이를 오가며 적들이 난도질당하는 과정을 한 호흡으로 담아낸다. R등급의 자유를 만끽하는 폭력. 피가 튀고 팔다리가 잘리는데 어딘가 코믹하다. 이 기묘한 톤의 균형이 데드풀 시리즈의 정체성이고, 이번 작품은 그것을 가장 세련되게 구현했다.

쓸모없어진다는 공포

그런데 이 난장판 코미디 밑바닥에 뜻밖의 진심이 깔려 있다. 쓸모없어진다는 공포.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는 두려움. 데드풀은 자기 우주가 삭제될 위기에 처하자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울버린은 자기가 지켜야 할 세계를 이미 잃었다. 두 캐릭터 모두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다. 영웅이 필요 없는 시대에 영웅으로 남고 싶다는 욕망. 이것은 슈퍼히어로 장르 전체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마블 피로증후군(疲勞症候群)이 회자되고, 흥행 실패작이 연이어 나오는 시점에 “우리가 아직 필요해”라고 외치는 영화.

솔직히 나는 이 절박함이 영화 밖에서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라. 대체될까 봐 불안해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AI가 내 일자리를 빼앗을까. 젊은 세대가 나를 밀어낼까. 플랫폼이 바뀌면 나는 도태되는 것 아닐까. 쓸모의 증명. 존재의 정당화. 모두가 자기 우주의 삭제를 두려워하며 산다. 데드풀처럼 떠들며 관심을 구걸하거나, 울버린처럼 침묵 속에 죄책감을 곱씹거나.

‘데드풀과 울버린’은 완벽한 영화가 아니다. 줄거리는 느슨하고, 감정선은 종종 농담에 파묻히며, 팬서비스가 서사를 대체하는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자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프랜차이즈 피로를 조롱하면서 프랜차이즈를 연장하고, 죽은 캐릭터를 되살리면서 그 행위의 위선을 인정하고, 관객의 노스탈지아를 착취하면서 “그래, 우리 다 이거 보러 온 거잖아”라고 웃는다. 이 뻔뻔함이 어떤 영화들의 위선보다 낫다. 적어도 속이진 않으니까.

덧붙이자면, 나도 이런 글을 쓰면서 내 쓸모를 증명하려는 것일지 모른다. 영화평이라는 직업 자체가 AI에 대체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시대에, 인간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있다고 믿고 싶어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데드풀처럼. 아직 삭제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