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설명하지 않을 권리 — 영 앤 뷰티풀

「영 앤 뷰티풀」 (Jeune & Jolie) · 프랑수아 오종 (François Ozon) · 2013

영 앤 뷰티풀 (2013) 이미지
「영 앤 뷰티풀」 (2013) 이미지 © T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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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오종의 「영 앤 뷰티풀」은 실패한 영화다. 17세 소녀가 왜 몸을 팔기 시작했는지 끝내 설명하지 않는다. 트라우마도 없고, 가정폭력도 없고, 경제적 궁핍도 없다. 파리 상류층 가정의 예쁜 딸이 어느 여름 처녀성을 잃고, 가을이 되자 호텔 방에서 중년 남자들을 만난다. 왜? 영화는 모른다고, 혹은 말하지 않겠다고 답한다. 「버라이어티」의 피터 드브루지는 이 의도적 모호함을 “설명 충동에 시달리는 수많은 청소년 섹슈얼리티 영화들에 대한 거부”라고 불렀는데, 나는 이것이 칭찬인지 비판인지 아직도 분간이 안 된다. 아마 오종 자신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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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 바크트는 영화 내내 몽유병 환자처럼 걷는다. 존재하되 닿을 수 없는 얼굴. 스크린에 투사된 수수께끼 그 자체. 오종은 이 불투명함을 네 개의 계절로 나누고, 각 챕터마다 프랑수아즈 아르디의 노래를 깐다. 60년대 샹송의 달콤한 우수가 미성년 매춘이라는 소재 위에 얹힌다. 이 조합은 의도적으로 불편하다. 고급 향수 광고의 톤으로 촬영된 부르주아적 일탈. 오종은 이자벨을 피해자로 만들지도, 가해자로 만들지도, 환자로 만들지도 않는다. 그냥 관찰한다. 부모가 딸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보이는 반응—당혹, 수치심, 설명을 찾으려는 필사적 시도—이 어쩌면 영화의 진짜 과녁이다. 왜 이 아이가 이런 선택을 했는지보다, 왜 이 가족은 그 선택을 이해할 수 없는지. 프랑스 상류 중산층의 안일함에 대한 조용한 고발이 거기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졸렸다. 오종의 거리두기가 미학적 통제인지 감정적 회피인지 구분이 안 됐기 때문이다. 영화가 스스로의 수수께끼를 너무 사랑하는 것 같았다. 샬롯 램플링이 후반부에 등장해 죽은 고객의 미망인 역을 맡는다. 단 한 장면. 그 장면에서만 욕망과 고독과 죽음이 실제로 만난다. 나머지 100분이 피해 다니던 감정의 심연이 거기서 잠깐 열린다. 왜 오종은 이 깊이를 영화 전체에 허락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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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앤 뷰티풀」은 답을 주지 않음으로써 모든 답을 관객에게 떠넘긴다. 이것을 정직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책임 회피라고 부를 수도 있다.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이 영화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이자벨을 생각하게 된다. 심리적 동기를 제공받았다면 우리는 그녀를 이해하고 닫았을 것이다. 오종은 그 문을 닫지 않았다. 열어둔 채로 영화를 끝낸다. 실패는 때때로 가장 오래 남는 종류의 성공이다. 나는 이 영화가 싫은데, 잊히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