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재활용의 연금술 — 펄프 픽션
「펄프 픽션」 (Pulp Fiction) · 쿠엔틴 타란티노 (Quentin Tarantino) · 1994
햇살이 쏟아지는 LA의 다이너. 테이블 위에는 커피와 담배 연기. 팀 로스와 아만다 플러머가 마주 앉아 있다. 둘은 은행 강도의 비효율성에 대해 논쟁한다. 레스토랑이 더 낫지 않겠어? 손님들은 영웅 흉내를 안 내거든. 대화는 느긋하게 흘러가다 갑자기 두 사람이 총을 뽑아 든다. “Everybody be cool, this is a robbery!” 화면이 멈추고, 서프 록 기타 리프가 터진다. 《펄프 픽션》의 문이 열린다.
1994년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심사위원단은 아마 자신들이 무엇에 투표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 영화는 장르영화의 잔해로 지은 성당이다. 누아르, 블랙스플로이테이션, 프랑스 누벨바그, 이름 모를 B급 범죄물의 파편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과물은 표절이 아니라 발명처럼 보인다. 《사이트 앤 사운드》의 조너선 롬니는 이를 두고 ‘인용이 아닌 변환’이라 불렀다. 타란티노는 자신의 영향들을 완전히 소화해서 인용문이 아닌 새로운 문장을 뱉어낸다는 것이다.
세 개의 이야기가 뒤섞인다. 두 청부업자의 하루, 권투선수의 도주, 마약상 아내와의 위험한 저녁. 시간 순서는 멋대로 뒤집어진다. 한 에피소드에서 죽은 인물이 다른 에피소드에서 멀쩡히 걸어 다닌다. 이 시간 뒤틀기가 그저 잔머리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보면 이게 운명과 선택에 관한 이 영화의 진짜 문법이라는 걸 알게 된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지만, 서사는 되돌릴 수 있다. 그 간극에서 기묘한 윤리학이 피어난다.
존 트라볼타의 복귀가 여기서 이루어진다. 《토요일 밤의 열기》 이후 거의 10년을 의미 있는 작품 없이 보낸 배우가, 헤로인 중독 청부업자 빈센트 베가로 돌아왔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멍한 눈빛, 그러나 어딘가 품위 있는 불안함. 트라볼타는 쿨함 뒤에 숨은 공허를 연기한다(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그가 누군지도 몰랐다. 세대의 문제다). 우마 서먼의 미아 월러스와 마주 앉은 저녁 식사 장면은 긴장과 유혹이 교차하는 걸작이다. 척 베리의 “You Never Can Tell”에 맞춰 추는 트위스트는 오마주이자 유혹이자 자기참조다. 세 가지 기능이 동시에 작동하는 2분.
사무엘 L. 잭슨의 줄스 윈필드는 이 영화의 도덕적 중심이다. 성경 구절을 외우며 사람을 죽이는 킬러가 어떻게 도덕적 중심이 될 수 있는가. 그가 ‘기적’을 목격한 뒤 겪는 변화 때문이다. 총알이 빗나갔다. 우연인가, 신의 개입인가. 줄스는 후자를 선택하고, 살인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영화 말미에 그가 다이너의 강도들 앞에서 쏟아내는 독백—에스겔서 25장 17절에 대한 재해석—은 《펄프 픽션》이 단순한 장르 유희가 아니라는 증거다. 혼란混亂의 한복판에서 구원을 말하는 목소리.
타란티노의 대사는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다. 킬러들이 유럽 맥도날드의 치즈버거 이름에 대해 토론한다. 발 마사지가 성적 행위인지 아닌지를 진지하게 따진다. 이 잡담들이 웃기면서도 묘하게 철학적이다. 살인자들을 포스트모던 철학자로 만드는 기술. 데이비드 마멧의 인공적 대사가 자연주의로 보일 정도로, 타란티노의 언어는 과잉 양식화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진짜처럼 들린다. 이건 재능이다. 가르칠 수 없는 것.
폭력에 대해 말해야겠다. 《펄프 픽션》의 폭력은 충격적이면서 코믹하고, 리얼하면서 거리두기가 있다. 차 뒷좌석에서 실수로 머리가 날아가는 장면. 끔찍하지만 타란티노는 그 직후 피 묻은 차를 청소하는 과정을 코미디로 처리한다. 관객은 웃어야 할지 역겨워해야 할지 헷갈린다. 이 불편함이 의도적이라는 게 중요하다. 감독은 관객에게 안전한 동일시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재활용의 연금술’인 이유가 여기 있다. 타란티노는 모든 것을 빌려왔지만, 결과물은 그 어떤 원본과도 닮지 않았다. 독창성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창조하는 방법. 《펄프 픽션》은 영화가 아니라 방법론이다.
30년이 지났다. 타란티노의 영향을 받은 영화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은 표면만 모방했다. 재치 있는 대사, 시간 뒤틀기, 팝 음악과 폭력의 병치. 이것들만 베끼면 싸구려가 된다. 진짜 타란티노의 핵심은 따로 있다. 관습을 해체하면서 관습을 사랑하는 태도. 냉소와 진심의 공존. 이걸 훔치기는 어렵다.
요즘 콘텐츠 시장을 보면 재활용은 기본이다. IP 확장, 리부트, 프리퀄, 스핀오프. 모두가 과거를 뒤진다. 그러나 대부분은 연금술이 아니라 재탕이다. 원재료를 변환하지 못하고 그냥 데워서 내놓는다. 《펄프 픽션》을 다시 보면서 생각했다. 창작의 미래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로 아직 없는 것을 만드는 기술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문제는 그 기술이 희귀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재활용을 하지만, 금金을 만드는 사람은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