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앙상블의 무게, 혹은 블록버스터가 캐릭터를 믿을 때 — 어벤져스

「어벤져스」 (The Avengers) · 조스 웨던 (Joss Whedon) · 2012

어벤져스 (2012) 이미지
「어벤져스」 (2012) 이미지 © TMDb

테서랙트가 깨어나는 순간

쉴드 연구 시설의 지하. 푸른빛이 감도는 큐브가 스스로 맥동하기 시작한다. 비상등이 점멸하고 과학자들이 황급히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사이, 공간이 찢어지듯 열리며 한 남자가 등장한다. 로키. 그는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요원들의 의지를 빼앗고 테서랙트를 손에 쥔다. 시설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그의 표정은 태연하다. 이 순간 닉 퓨리가 내뱉는 대사 하나. “전쟁이다.” 영화 ‘어벤져스’는 그렇게 시작한다.

TV맨이 블록버스터를 쥐다

조스 웨던이라는 이름 앞에는 오랫동안 ‘컬트’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 ‘파이어플라이’. 그의 필모그래피는 광적인 팬덤과 조기 종영의 역사였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그에게 1억 달러 이상의 예산을 맡긴다는 소식에 회의론이 없지 않았다. 《버라이어티》의 저스틴 창은 개봉 당시 리뷰에서 이렇게 썼다. “웨던은 블록버스터 스케일의 스펙터클을 다루면서도, 자신의 경력을 규정해온 캐릭터 중심의 재치를 희생시키지 않음을 증명했다.” 정확한 진단이다.

웨던의 TV 경력은 오히려 장점이 됐다. 시리즈물 연출자는 매 회 제한된 러닝타임 안에서 앙상블 캐스트에게 균등한 무게를 부여해야 한다. 누구 하나 묻히면 시청자가 떠난다. ‘어벤져스’의 142분은 여섯 명의 마퀴 히어로가 각자의 순간을 확보하면서도 서사가 흐트러지지 않는, 일종의 연출적 균형 감각을 보여준다.

냉소와 신념 사이

영화의 첫 한 시간은 전투가 아니라 대화(對話)에 할애된다. 쉴드 헬리캐리어 안에서 벌어지는 언쟁들. 토니 스타크와 스티브 로저스의 충돌이 핵심이다. 스타크는 모든 것을 비웃고, 로저스는 모든 것을 믿으려 한다. “옷을 벗으면 뭐가 남지?” 스타크가 던지는 조롱에 로저스는 답한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군.” 이 장면은 단순한 말다툼이 아니다. 냉소주의와 이상주의, 개인과 집단 사이의 균열을 142분 내내 관통하는 철학적 대립선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프랜차이즈의 가장 귀한 자산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정서적 중심추는 마크 러팔로의 브루스 배너에게 있다. 그는 괴물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과학자다. 쉴드 헬리캐리어 안에서 그의 불안은 조용히 축적된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시선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한다. 러팔로가 보여주는 이 절제된 불안감이야말로 관객이 배너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헐크로 변신한 뒤 로키를 바닥에 내리찍는 장면이 터지는 웃음을 자아내는 이유는, 그 순간이 배너가 품고 있던 억압된 에너지의 분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맨해튼이 무너질 때

3막의 뉴욕 전투 시퀀스는 단순한 스펙터클이 아니다. 여러 캐릭터가 동시다발적으로 싸우는 상황에서 관객이 공간적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설계된, 일종의 안무(按舞)다. 촬영감독 시머스 맥가비는 카메라를 한 히어로에서 다른 히어로로 매끄럽게 이동시키며, 도시 전체를 하나의 전장으로 읽히게 만든다. 호크아이가 빌딩 옥상에서 화살을 쏘고, 블랙 위도우가 치타우리 스쿠터에 올라타고, 헐크가 외계인을 집어던지는 장면들이 개별 숏이 아니라 하나의 리듬으로 연결된다.

이 시퀀스가 인상적인 이유는 또 있다. 히어로들이 민간인을 구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삽입된다는 것. 캡틴 아메리카가 경찰에게 대피 지시를 내리고, 아이언맨이 무너지는 건물 아래 깔린 시민을 끌어낸다. 도시가 파괴되는 와중에도 영화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는 것이다.

로키라는 한계

빌런 로키는 영화의 아킬레스건이다. 톰 히들스턴의 연기는 매력적이지만, 캐릭터의 동기가 불분명하다. 지구를 정복하려는 이유가 단순히 형 토르에 대한 열등감과 권력욕으로 환원되는 건 다소 약하다.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가 지적했듯, “플롯 장치들이 다소 정형적으로 느껴진다—마법의 맥거핀, 하늘의 포탈, 일회용 외계인 군대.” 맞는 말이다. 로키의 위협이 시종일관 일정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때로는 신처럼 강하고, 때로는 헐크에게 갈 데까지 가듯 얻어맞는다.

그러나 웨던은 빌런의 약점을 히어로 간의 케미로 상쇄한다. 적이 왜 위협적인가보다, 히어로들이 왜 뭉쳐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어벤져스’는 선과 악의 대결보다 ‘협력’의 드라마에 가깝다. 각자의 자존심과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들이 어떻게 한 팀이 되는가. 영화의 진짜 서사는 거기에 있다.

블록버스터의 분기점

‘어벤져스’는 슈퍼히어로 장르의 분기점이었다. 단독 시리즈들을 하나의 유니버스로 엮는 ‘시네마틱 유니버스’ 모델이 이 영화 이후 산업 표준이 됐다. DC가 뒤따랐고, 유니버설이 ‘다크 유니버스’를 시도했다가 실패했으며, 소니가 스파이더맨 스핀오프들을 묶으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캐릭터를 집어던지고 세계관만 확장하려다 좌초했다. 웨던이 증명한 것은 단순하다. 관객은 폭발보다 인물에 먼저 연결된다는 것.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히어로들이 중동 음식점에서 샤와르마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대사 없이 피곤한 얼굴로 음식을 씹는 여섯 명. 그 짧은 숏이 주는 묘한 위안이 있다. 세계를 구한 자들도 결국 배가 고프다. 2012년 이후로 슈퍼히어로 영화는 수십 편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 단순한 진실—캐릭터를 믿으면 관객도 믿는다는 것—을 제대로 실천한 작품은 손에 꼽힌다. ‘어벤져스’는 여전히 그 목록의 상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