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기적을 목격한 자의 의무 — 그린 마일
「그린 마일」 (The Green Mile) · 프랭크 다라본트 (Frank Darabont) · 1999
[1] 3시간 9분.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그린 마일’(1999)이 요구하는 시간이에요. 1935년 루이지애나주 콜드마운틴 교도소 사형수 감방, 그 좁고 눅눅한 복도를 오가는 간수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데 필요한 인내의 양이죠. 요즘 같은 숏폼 전성시대에 관객에게 이 정도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려면 얼마나 도발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까요? 이 영화의 물음은 이거예요. ‘기적을 목격한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형을 집행해야 할 죄수가 치유의 능력을, 아니 어쩌면 구원의 힘을 가진 존재라면, 그 형장의 스위치를 당기는 손가락에는 무슨 자격이 필요할까요?
[2] 존 코피(마이클 클라크 던컨)는 두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거구의 흑인 남성이에요. 그러나 그는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자죠. 손을 대면 병이 낫고, 타인의 고통을 자기 몸으로 빨아들이고, 생명을 되돌려놓아요. 간수장 폴 에지콤(톰 행크스)은 이 불가해한(不可解)·불가항력(不可抗力)의 존재 앞에서 무력해지고요. 다라본트 감독이 ‘쇼생크 탈출’(1994)에 이어 또다시 스티븐 킹 원작을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니에요. 감옥이라는 폐쇄 공간에서 인간 존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그의 고집스러운 장인 정신은 이 3시간짜리 완속 열차를 끝까지 굴러가게 하는 동력이에요. 톰 행크스는 오스카 수상작들에서 보여줬던 화려함을 접고 낮은 음역대로 연기해요. 그의 폴은 믿음과 직무 사이에서 갈라지는 인간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3] 물론 이 영화의 인종 정치학은 불편해요. 영국 영화지 《사이트 앤 사운드》의 비평가 김 뉴먼은 “코피가 백인 캐릭터들의 영적 교육을 위해 존재한다”고 썼죠. 맞아요. ‘마법적 흑인(magical Negro)‘이라는 헐리우드 클리셰의 전형처럼 읽힐 위험은 분명해요. 그런데 던컨의 연기가 이 도식을 교란해요. 그는 대사 한마디 없이 눈물만으로, 인간의 잔혹성을 마주한 자의 슬픔을 전달해요. 각본이 상징적 기능에 머물렀을 자리에서 그는 온전한 내면을 주장해요. 경비원 출신이던 그가 어떻게 이런 연기를 해냈는지 모르겠어요. 다만 기적을 연기한 배우가 기적의 연기를 보여줬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요. 이 영화가 노골적으로 감정을 조작하고, 신파적이고, 때로 지루하다는 건 저도 인정해요. 그런데 저는 끝내 울었어요. 비평적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말이죠. 그게 다라본트의 재능인지, 아니면 가장 정교한 조작인지는 판단을 유보할게요.
[4] 한국 사회에도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넘쳐요. 부패한 정치인을 처단할 영웅, 불의를 응징할 판사, 억울함을 밝혀줄 검사. 그런데 기적은 책임을 동반하지 않나요? 기적을 목격하고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공범 아닐까요? ‘그린 마일’이 묻는 건 결국 이거예요. 형장의 스위치를 누를 자격이 있느냐가 아니라, 누르지 않을 용기가 있느냐는 것이죠. 넷플릭스 예능에서나 ‘공정’을 구경하는 시대에, 이 질문은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