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바이런 하워드 감독께 — 주토피아 2

「주토피아 2」 (Zootopia 2) · 바이런 하워드 + Byron Howard · 2025

주토피아 2 (2025) 이미지
「주토피아 2」 (2025) 이미지 © TMDb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얼리히는 이렇게 썼다. “첫 번째 영화는 관객에게 생각하라고 요청했다. 이 영화는 대부분 느끼라고 요청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키보드 위에서 손을 뗐다. 정확히 내가 쓰려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감독님, 솔직히 말씀드린다. 나는 2016년 《주토피아》가 그렇게까지 대단한 영화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시스템적 편견에 대한 우화? 그건 좋았다. 하지만 동물 도시의 알레고리가 인종 문제를 완벽하게 번역해낸다고 믿는 건 좀 순진했다.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 영화는 최소한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공포가 어디서 오는지, 선의를 가진 자도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그 정도 칼날을 품은 건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묻는다. 《주토피아 2》는 왜 그 칼을 집어넣었는가.

파충류가 포유류 도시에 들어온다. 뱀 캐릭터 게리 드스네이크가 등장한다. 설정만 보면 이민, 제노포비아, 자유주의적 관용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재료(材料)는 다 갖춰져 있었다. 그런데 영화는 그 방향으로 한 발 내딛다가 황급히 돌아선다. 게리의 서사는 예측 가능한 화해로 끝나고, 주토피아의 포용성에 대한 질문은 결국 “우리는 다 함께할 수 있어”라는 무난한 결론으로 수렴한다. 나는 또 속았다. 예고편의 긴장감이 본편에서 증발하는 광경을 몇 번이나 더 봐야 하는 건지.

물론 영화가 형편없다는 말은 아니다. 시각적으로 이 영화는 경이롭다. 지하 굴 지구(地區), 네온으로 뒤덮인 파충류 구역, 수직 열대우림을 가로지르는 추격씬—프레임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팀의 기술적 역량이 폭발한다. 키 호이 콴이 목소리를 맡은 게리의 움직임, 사지 없이 미끄러지듯 흐르는 그 불안하고도 우아한 동선은 기술적 성취라 불러도 좋다. 주디와 닉의 케미스트리도 건재하다. 지니퍼 굿윈과 제이슨 베이트먼은 이 캐릭터들을 자기 몸처럼 안다. 둘 사이의 조용한 순간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인 뒤에만 가능한 그 편안함은 진짜 감동이다.

그런데 감독님, 바로 그게 문제 아닌가. 《주토피아 2》는 ‘느끼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웃기고, 감동적이고, 볼거리도 넘친다. 하지만 ‘생각하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첫 편이 던진 질문들—편견은 어디서 오는가, 선의만으로 충분한가—이 속편에서는 장식품(裝飾品)이 되어버렸다. 메타포는 계산적이 되었고, 결론은 안전해졌다. 프랜차이즈의 확장이라는 제약 안에서 위험을 감수하기엔 이해관계가 너무 커졌는지도 모른다.

나도 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일 수 있다. 속편은 늘 이런 딜레마에 빠진다. 첫 편의 성공 공식을 반복해야 하는 동시에 새로워야 하고, 관객을 편안하게 해야 하는 동시에 도전해야 한다. 양립(兩立) 불가능한 요구들. 대부분의 속편은 전자를 택한다. 《주토피아 2》도 그랬다. 그게 틀린 선택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흥행은 성공할 것이고, 가족 관객들은 만족할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손에 쥐고 있던 위대함을 놓아버렸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감독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쭤도 될까. 게리 드스네이크는 결국 위협이었나, 오해였나. 영화는 끝내 어느 쪽으로도 확답하지 않았다. 그건 정교한 모호함인가, 아니면 결정을 회피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