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판도라의 숲, 자본의 불도저 앞에 서다 — 아바타

「아바타」 (Avatar) · 제임스 카메론 (James Cameron) · 2009

아바타 (2009) 이미지
「아바타」 (2009) 이미지 © TMDb

제임스 카메론은 『타이타닉』 이후 12년간 침묵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심해 탐사선을 타고 바다 밑바닥을 누볐고,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만들어냈으며, 컴퓨터 앞에서 단 한 프레임의 이미지를 위해 수천 번의 렌더링을 반복했다. 할리우드는 그를 잊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230억 달러의 도박, 그리고 눈속임이 아닌 눈

『아바타』의 제작비는 2억 3천만 달러에 달한다. 이 숫자는 단순한 예산이 아니라 하나의 선언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도달할 수 있는 시각적 극한이 어디인지를 증명하겠다는 집념의 값이다. 카메론이 고집스럽게 밀어붙인 3D 기술은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장식이 아닌 필수가 된다. 할렐루야 산맥 위를 나는 장면에서 관객은 실제로 현기증을 느낀다. 그것은 기술적 장난이 아니라 새로운 문법이다.

판도라라는 행성은 카메론이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생태계다. 발광하는 숲, 신경망처럼 연결된 모든 생명체, 생물학적으로 그럴듯한 외계 동식물. 버라이어티의 토드 매카시는 이를 두고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경계가 사실상 사라졌다”고 썼다. 틀린 말이 아니다. 조이 살다나가 연기한 네이티리는 완전히 픽셀로 이루어진 존재임에도 올해 가장 설득력 있는 캐릭터 중 하나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

그러나 이 기술적 혁명 아래 깔린 서사는 낯익다. 하반신 마비 해병대원이 원주민 사회에 스며들어 그들의 구원자가 된다는 줄거리는 『늑대와 춤을』부터 『라스트 사무라이』까지 숱하게 반복된 원형이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불과 몇 달 만에 나비족 최고의 전사가 되고, 전설의 토룩을 길들이는 선택받은 자가 된다. 백인 구원자 서사의 가장 투명한 형태다.

스티븐 랭이 연기한 악역 쿼리치 대령은 만화경처럼 단순하다.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가 지적했듯 그는 “폭주한 군 홍보 포스터”에 가깝다. 카메론의 환경주의적 메시지, 제국주의 비판은 알레고리가 아니라 직설이다. 자원 수탈, 원주민 이주, 군산복합체의 폭력. 그 모든 것이 노골적으로 펼쳐진다.

스펙터클이 윤리를 묻는 방식

모순은 여기에 있다. 『아바타』는 정복과 착취를 비판하면서도 정복의 쾌락을 선사한다. 아름다운 행성을 불태우는 장면에서 관객은 분노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광경의 웅장함에 매혹된다. 영화는 제국주의를 고발하면서도 그 제국주의적 시선 안에서 작동한다. 판도라는 관객이 정복해야 할 또 하나의 신비로운 세계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영화가 진실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펙터클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그 즐거움 속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바로 그 불편함이 세상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자원 전쟁과 환경 파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어둠 속 극장에서 판도라를 올려다볼 것이다.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할 것이다. 그리고 불이 켜지면 자문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지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