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브레이킹 배드
「브레이킹 배드」 (Breaking Bad) · 빈스 길리건 (Vince Gilligan) · 2008
선택의 무게
영국 《가디언》의 마크 로슨은 이 드라마를 두고 “토니 소프라노는 폭력 속에서 태어났지만, 월터 화이트는 폭력을 선택했다”고 썼다. 그 한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태생과 선택. 이 차이가 왜 그토록 불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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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나는 오래전 이 시리즈를 보다가 중간에 껐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불쾌해서도 아니었다. 월터 화이트라는 인간이 나와 너무 닮아 있어서였다. 폐암 선고를 받은 고등학교 화학 교사가 가족의 미래를 위해 마약을 제조한다는 설정. 듣기엔 황당하다. 그런데 브라이언 크랜스톤이 연기하는 월터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황당함은 증발한다. 저 눈빛은 내가 아는 눈빛이다. 아침마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중년 남성들의 눈빛. 회사에서, 가정에서, 수십 년간 자신을 눌러온 사람들의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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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스 길리건 감독은 시트콤 배우 출신 크랜스톤을 기용하면서 확신했을 것이다. 이 남자는 평범함의 무게를 안다고. 《말콤 인 더 미들》에서 허술한 아버지를 연기하던 사람이 어깨를 움츠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세상에 밟혀온 남자를 연기할 때, 우리는 웃음이 아니라 섬뜩함과 마주한다. 크랜스톤은 월터의 “합리화가 형성되는 순간”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처음엔 가족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돈이 필요해서라고. 그러나 어느 지점을 지나면 그 변명은 껍데기가 된다. 남는 건 오래 억눌려온 분노, 그리고 마침내 해방된 자의 황홀경.
사막이 비추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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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멕시코의 사막은 이 드라마에서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한다. 바싹 마른 땅, 무한히 펼쳐진 하늘. 저 황량함은 월터가 처한 실존적 공허를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범죄가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버라이어티》의 표현대로라면 “존재론적 위기의 거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드라마가 마이애미의 화려함도, 뉴욕의 세련됨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문명의 가장자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택했다.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이 중심을 향해 폭발하는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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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폴이 연기하는 제시 핑크맨은 월터의 거울이자 그림자다. 전직 제자이자 마약 제조 파트너인 이 젊은이는 허세 뒤에 상처를 숨기고 있다. 월터와 제시의 관계는 사제지간처럼 보이다가 부자지간처럼 보이다가, 결국 서로를 착취하는 공범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아는 모든 인간관계의 추한 민낯이 저 둘 사이에 응축되어 있다.
우리 안의 하이젠베르크
여기서 나는 질문을 한국 사회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월터 화이트는 왜 “돈을 위해서”라는 변명 뒤에 숨었을까. 그것이 가장 명예로운 동기이기 때문이다.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의지. 이 서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서사다. IMF 이후 한국 남성들이 줄기차게 들어온 서사. “다 너희들 먹여 살리려고 그런 거야.”
그런데 월터의 진짜 동기는 다른 곳에 있었다.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것. 존재감을 되찾겠다는 것. 세상이 나를 투명인간 취급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것. 암 선고는 방아쇠였을 뿐이다. 총알은 이미 장전되어 있었다. 수십 년간.
한국의 50대 남성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통계가 있다. 원인은 복합적이겠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며 하나의 가설을 떠올린다. 월터 화이트가 되지 못한 남자들, 폭발하지 못하고 내파(內破)한 남자들이 저 통계를 채우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마약을 제조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아름다운 거짓말 뒤에 숨은 분노와 좌절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외면해왔는지, 이 미국 드라마가 역설적으로 질문하고 있다.
괴물은 하루아침에 태어나지 않는다. 작은 합리화가 쌓이고, 사소한 선 넘기가 반복되고, 어느 순간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통과한다. 《브레이킹 배드》는 그 과정을 62개 에피소드에 걸쳐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래서 무섭다. 저건 미국 드라마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잠재적 자서전이기 때문이다.
나? 나는 아직 월터 화이트가 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다만 오늘도 소소한 합리화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출근했다는 건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