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브래드 피트에게 — F1

「F1」 (F1) · 조셉 코신스키 (Joseph Kosinski) · 2025

F1 (2025) 이미지
「F1」 (2025) 이미지 © TMDb

당신이 61세에 실제 F1 머신을 몰기 위해 수개월간 드라이빙 훈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톰 크루즈가 ‘탑건: 매버릭’에서 직접 전투기 조종석에 앉았던 것처럼, 당신도 스턴트맨에게 얼굴을 빌려주는 대신 200마일 속도의 공포를 온몸으로 받아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얼리치는 이 영화를 두고 “눈을 현혹하면서 뇌는 중립 기어에 방치한다”고 썼는데, 나는 그 평에 절반만 동의한다.

① 기술적 성취부터 말하자면, ‘F1’은 경이(驚異)와 위압(威壓)의 동시 공습이다. 조셉 코신스키 감독은 모나코, 실버스톤, 아부다비에서 열린 실제 그랑프리 주말에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아스팔트에 바짝 붙은 렌즈, 흉골을 울리는 하이브리드 V6 엔진의 포효, 커브를 깎아내리는 타이어의 비명. 어떤 스튜디오 시뮬레이션도 이 촉감을 복제할 수 없다. 당신이 비에 젖은 상파울루 서킷에서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리는 대사 “넌 트랙과 경쟁하는 게 아니야. 너 자신과 경쟁하는 거야”는 포춘쿠키 문구처럼 들리지만, 그 순간만큼은 관객의 심장이 레드라인을 넘는다.

② 문제는 레이싱 시퀀스가 끝나고 피트장으로 돌아왔을 때다. 에렌 크루거의 각본은 온갖 스포츠 영화의 부품 창고에서 조립한 듯하다. 몰락한 전설이 복귀한다, 건방진 신예가 겸손을 배운다, 악역 구단주가 음모를 꾸민다. 중반부에 삽입된 사보타주 서브플롯은 마치 이전 초안에서 잘라내다 남은 잔해 같고, 당신과 담손 이드리스의 케미가 아니었다면 대사들은 동기부여 포스터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케리 콘던의 팀 대표 역할도 매력적이지만 충분히 쓰이지 못한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신나게 씹어먹긴 하는데, 그가 씹는 건 악역의 껍데기일 뿐이다.

③ 더 씁쓸한 건 ‘F1’이 외면한 것들이다. F1은 인권 논란의 독재국가들이 앞다투어 유치하는 스포츠워싱의 전시장이다. 탄소 발자국을 지구 곳곳에 찍으며 순회하는 서커스이며, 계급 장벽이 유독 높은 엘리트 스포츠다. 영화는 그 어떤 균열도 보여주지 않는다. 패배조차 포토제닉하게 빛나는 밀폐된 세계, 화려(華麗)와 공허(空虛)가 공존하는 글로벌 카니발. 프로듀서 루이스 해밀턴이 원한 건 전도(傳道)였을 테고, 그 목적에 이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복무한다.

④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61세의 육신을 접이식 카본 콕핏에 쑤셔 넣으며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는가. 한국에서는 50대 중반이면 “이제 물러나시죠”라는 눈초리가 날아온다. 현역의 자리는 좁고, 경험은 빠르게 폐기된다. 당신의 주름진 얼굴이 헬멧 안에서 G포스에 일그러지는 장면은, 그래서 묘한 위안이 된다. 속도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고, 트랙 위에선 누구나 자기 자신과만 싸운다고.

결국 ‘F1’은 완벽한 기계다. 다만 결승선 너머의 목적지는 없다. 피트 씨, 당신의 다음 레이스에선 조금 더 불편한 코너를 돌아주길 바란다. 관객은 생각보다 멀미에 강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