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재현(再現)의 자격 — 쉰들러 리스트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 ·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 1993

쉰들러 리스트 (1993) 이미지
「쉰들러 리스트」 (1993) 이미지 © TMDb

질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사이트 앤 사운드》의 Geoffrey Macnab은 <쉰들러 리스트>를 두고 이렇게 물었다. “영화의 본질적인 미학화가 이해를 초월하는 사건에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가?” 1993년에 제기된 이 질문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답을 기다린다. 어쩌면 답이 없다는 것이 답일지 모른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카메라를 들었다. 상어, 외계인, 공룡을 화면에 불러낸 남자가 600만 명의 유령 앞에 섰다.

흑백(黑白)이라는 결단

색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야누시 카민스키의 흑백 촬영은 뉴스릴과 기록사진의 질감을 소환한다. 관객은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안으로 던져진다. 그런데 이 흑백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구도는 정교하고, 빛은 계산되어 있으며, 어둠조차 연출되어 있다. 진정성의 외피를 두른 인공물. 스필버그는 이 모순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순 위에 영화를 세운다. 기록과 허구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대신, 양쪽 발을 동시에 딛는다.

붉은 코트의 소녀는 이 전략의 정점이다. 흑백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홍색 점. 누군가는 시적 은유라 하고, 누군가는 조작이라 한다. 둘 다 맞다. 스필버그는 감정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그 유도를 노출한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당신의 것이자 내가 설계한 것이다—이 불편한 공범 관계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상아(商賈)를 주인공으로

오스카 쉰들러는 기이한 선택이다. 홀로코스트 영화의 주인공으로 독일인 사업가라니. 유대인 희생자들은 집단으로 묶이고, 그들의 개별성은 희미해진다. Macnab의 지적처럼 이것은 한계이자 전략이다. 관객에게 가해자 측의 시점을 제공함으로써 접근성을 확보한다. 불편하지만 효과적이다.

리암 니슨의 연기는 이 전략을 구제한다. 그의 쉰들러는 선인도 악인도 아니다. 전쟁을 사업 기회로 보는 기회주의자에서 출발해, 천천히, 너무 천천히 무언가를 깨닫는다. 니슨은 그 각성의 순간을 명시하지 않는다. 관객은 쉰들러가 언제 변했는지 집어낼 수 없다. 어느 순간 그가 달라져 있음을 발견할 뿐이다. 마지막 장면, 더 많이 구할 수 있었다며 무너지는 쉰들러—이 감정의 폭발이 과잉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니슨이 세 시간 동안 축적한 억제 덕분이다.

괴물의 인간성

랄프 파인스의 아몬 괴트는 이 영화가 낳은 가장 문제적인 창조물이다. 악의 평범성을 말하기는 쉽다. 그것을 육화(肉化)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파인스는 괴트를 괴물로 그리지 않는다. 발코니에서 유대인을 저격하는 남자는 아침 커피를 마시듯 방아쇠를 당긴다. 잔혹함은 일상의 일부이고, 일상이 잔혹함을 가능하게 한다.

유대인 하녀 헬렌 히르쉬와의 장면들은 이 불편함을 극대화한다. 괴트는 그녀에게 끌린다. 이데올로기가 금지한 감정이 그를 괴롭힌다. 파인스는 이 내적 갈등을 연민 없이, 그러나 이해 가능하게 연기한다. 관객은 괴트를 혐오하면서도 그의 논리를 따라가게 된다. 이것이 위험한가? 물론이다. 파시즘을 영화적으로 매력 있게 만드는 위험. 그러나 이 위험을 회피했다면 영화는 교과서가 됐을 것이다. 스필버그는 그 위험을 감수한다.

타협의 미학

<쉰들러 리스트>는 타협의 산물이다. 할리우드 문법으로 홀로코스트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타협이다. 구원 서사, 개인 영웅주의, 감정적 해소—이 모든 관습이 작동한다. 순수주의자들은 이 타협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처럼 증언과 침묵만으로 홀로코스트에 접근하는 방법이 더 윤리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쇼아>를 본 관객이 얼마나 되는가. <쉰들러 리스트>를 본 관객은 얼마나 되는가. 스필버그는 대중 영화의 문법이 가진 도달 범위를 알았다. 수천만 명의 관객에게 닿기 위해 순수성의 일부를 포기했다. 이것을 배신으로 볼 수도, 실용으로 볼 수도 있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실제 쉰들러 생존자들이 그의 무덤을 찾는다. 그들 옆에는 그들을 연기한 배우들이 서 있다. 허구와 현실이 겹쳐지는 이 순간, 영화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 한계 너머를 가리킨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야기 바깥에 실재했던 삶들이 있다.

남는 것

존 윌리엄스의 음악, 이자크 펄만의 바이올린 솔로가 영화를 감싼다. 애가(哀歌)의 선율. 이 음악이 감정을 조작하는가? 당연히 그렇다. 그 조작이 부당한가? 그건 각자가 답할 문제다.

스필버그는 이 영화로 성인이 됐다고들 한다. 상업 감독에서 예술가로 전환했다고. 그런 평가가 공정한지는 모르겠다. <쥬라기 공원>과 <쉰들러 리스트>를 같은 해에 내놓은 남자에게 이분법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관객을 삼키는 공룡도 만들고, 관객이 삼켜지는 역사도 만들었다. 둘 다 그의 영화다. 둘 다 그의 타협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울고, 울 때마다 그 눈물이 설계된 것인지 진짜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