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퇴행의 완성 —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 (Star Wars) · 조지 루카스 (George Lucas) · 1977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 (1977) 이미지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 (1977) 이미지 © T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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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미국 영화는 퇴행했다. 《스타워즈》는 그 퇴행의 완성이다. 《대부》와 《택시 드라이버》가 열어젖힌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복잡성, 도덕적 모호함, 어른의 영화를 조지 루카스는 단번에 뒤집었다. 대신 그가 꺼낸 것은 1930년대 《플래시 고든》 시리얼, 《오즈의 마법사》, 아서왕 전설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유치하다. 의도적으로, 전략적으로, 완벽하게 유치하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속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볼 때도 속았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쯤에야 인정했다. 속은 게 아니라 굴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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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이트 앤 사운드》의 톰 밀른은 이 영화의 시각적 혁신을 짚으며 ‘닳은 미래(used future)‘라는 표현을 썼다. 대부분의 SF가 번쩍이는 미래를 보여줄 때, 루카스의 우주선에는 탄소 자국이 있고 드로이드에는 찌그러진 흔적이 있으며 밀레니엄 팔콘은 ‘고물 덩어리’라 불린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존 배리와 콘셉트 아티스트 랄프 맥쿼리가 만든 이 ‘살아본 우주’는 기묘한 효과를 낳는다. 판타지를 촉각적 현실에 고정시켜 오히려 환상성을 증폭시킨 것이다. 존 다이크스트라 팀의 특수효과는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었고, 존 윌리엄스의 스코어는 대담하게도 무성영화 시절의 라이트모티프 전통으로 회귀했다. 메인 테마의 상승 5도 음정(上昇五度音程)은 영웅적 열망을 즉각 전달한다. 기술적으로 최첨단이면서 정서적으로는 고풍스럽다. 이 조합이 작동할 리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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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는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거의 도식적으로 따랐다고 공언했다. 모험으로의 소환, 초자연적 조력, 문턱의 횡단, 궁극적 보상. 루크 스카이워커의 여정은 심리적 복잡성을 의도적으로 탈락시킨 원형(archetype)이다. 마크 해밀은 적절히 눈 큰 열정으로, 캐리 피셔는 위기에 처한 공주치고는 유능하고 날카롭게, 해리슨 포드는 빈정대는 냉소로 균형을 잡는다. 알렉 기네스만이 셰익스피어적 위엄으로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대사에 무게를 입힌다”고 《뉴욕 타임스》의 빈센트 캔비는 썼다. 나머지 배우들? 훌륭하다기보다 기능적이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화에서 인물은 개인이 아니라 자리다. 루카스는 그 자리를 정확히 채웠을 뿐이다. 70년대 미국 영화의 ‘성숙한 주제’로부터의 후퇴인가, 신화적 스토리텔링으로의 건강한 복귀인가.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루카스가 자신이 선택한 문법 안에서 절대적 통제력을 보여줬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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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 스타 공격 시퀀스는 2차대전 폭격 영화의 정밀함으로 연출되었다. 제국군 스타 디스트로이어가 화면 위로 끝없이 지나가는 오프닝 쇼트는 루카스의 야심을 단번에 선언한다. 그 야심이란 무엇인가. 관객을 흥분시키고, 전율시키고, 저 멀리 은하계로 데려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 《스타워즈》는 자신이 유치하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유치함을 초월했다. 단순함을 밀어붙여 신화가 되었다. 퇴행이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퇴행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