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어둠 속에서 시작되는 미국의 자화상 — 대부
「대부」 (The Godfather) ·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Francis Ford Coppola) · 1972
“I believe in America.”
화면이 열리면 보이는 것은 거의 없다. 어둠이다. 극도로 억제된 조명 아래, 한 남자의 얼굴만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는 딸의 결혼식 날, 딸을 폭행한 남자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청탁하러 왔다.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카메라는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그제야 우리는 이 남자가 누군가의 앞에 앉아 있음을, 그 ‘누군가’가 모든 것을 들으며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돈 비토 콜레오네. 그 이름을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앰버빛 조명이 그의 주름진 얼굴 위로 떨어지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 직감한다.
세속(世俗)의 성찬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는 갱스터 영화의 문법을 빌려 미국의 자화상을 그린다. 《뉴욕 타임스》의 빈센트 캔비는 이 작품을 두고 “대중오락의 한계 안에서 설계된 가장 잔혹하고 감동적인 미국 생활 연대기”라 썼다. 정확한 표현이다. 마리오 푸조의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이 영화는 장르 컨벤션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선다. 폭력은 있으나 착취적이지 않고, 범죄가 등장하나 미화되지 않는다. 콜레오네 가문은 사업가이자 살인자이며, 가부장이자 독재자다. 코폴라는 이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다. 그저 제시할 뿐이다.
말론 브란도의 연기는 모방이 아니라 창조에 가깝다. 입안에 솜을 넣어 만들어낸 웅얼거리는 어조, 무심하게 꽃에 물을 주는 손, 손자를 앞에 두고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인물은 괴물이되 인간이며, 비정(非情)하되 자애롭다. 그러나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브란도가 아니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마이클 콜레오네다. 전쟁 영웅에서 가문의 수장으로, 차갑고 합리적인 살인자로 변해 가는 이 남자의 궤적이야말로 ‘대부’의 비극적 핵심이다.
빛이 닿지 않는 자리
코폴라와 촬영감독 고든 윌리스가 만들어낸 영상 언어는 르네상스 회화를 연상시킨다. 노출 부족을 의도적으로 활용해 대부분의 장면이 그림자 속에 잠긴다. 인물들의 눈은 어둠에 묻히고, 얼굴 절반만이 간신히 드러난다. 이것은 단순한 미장센이 아니라 도덕적 암시다. 콜레오네 가문이 움직이는 세계에서 도덕적 명료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례식과 학살이 교차 편집되는 유명한 시퀀스를 보라. 대부(代父)로서 신의 이름을 부르는 마이클의 입에서 경건한 서약이 흘러나오는 동안, 그의 부하들은 네 명의 경쟁자를 처형한다. 코폴라는 폭력과 의식(儀式)을 병치시킴으로써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질문에 부친다. 가문을 지키는 것과 인간성을 지키는 것, 이 둘은 양립 가능한가.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비평과 산업의 교차로
‘대부’의 성공은 뉴 할리우드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코폴라는 서른둘의 젊은 감독이었고, 파라마운트는 이 프로젝트가 실패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러나 결과는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찬사 양쪽을 거머쥐었다. 이 영화는 대중오락과 예술적 야심이 배타적 관계가 아님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도덕적으로 안전한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나 역시 리뷰를 쓰면서 이 영화가 주는 불편함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콜레오네 가문에 매혹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논리에 동의하기 시작한다.
마이클이 아내 케이의 질문에 단 한 번 거짓말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있다. 케이는 묻는다. “Is it true?” 마이클이 대답한다. “No.” 문이 닫히고, 케이는 그녀의 남편이 대부가 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그 닫힌 문 앞에서 우리는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돌아설 것인가. 코폴라는 그 선택을 관객에게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