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교도소에서 모차르트를 — 쇼생크 탈출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 · 프랭크 다라본트 (Frank Darabont) · 1994
[1] 어릴 적 텔레비전 영화채널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다. 한밤중이었고, 중간부터 봤다. 줄거리도 제대로 모른 채 끝까지 봤다. 다음 날 학교에서 졸았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설명이 안 된다. 팀 로빈스가 교도소 스피커로 오페라를 틀고, 죄수들이 운동장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장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만은 알 것 같았다. 프랭크 다라본트의 ‘쇼생크 탈출’은 그런 영화다.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데뷔작은, 이해보다 먼저 가슴에 닿는 종류의 서사를 품고 있다.
[2] 《가디언》의 데릭 맬컴은 이 영화를 두고 “서두르기를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작품”이라고 썼다. 적확(的確)한 지적이다. 요즘 영화들이 5분 안에 화끈한 볼거리를 배치하고, 관객의 주의를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과 정반대다. 다라본트는 거의 두 시간 반 동안 교도소의 일상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아내와 그 정부(情夫)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은행원 앤디(팀 로빈스)가 쇼생크 교도소에 도착하고, 오래 복역한 수감자 레드(모건 프리먼)와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영화의 전부다. 플롯이라 할 것도 없다. 그냥 산다. 구타당하고, 일하고, 숨기고, 버틴다. 로저 디킨스의 촬영은 감옥 창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마저 한 폭의 회화처럼 담아낸다. 토마스 뉴먼의 음악은 감상(感傷)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장면 곁에 머문다. 지루하냐고? 지루하다. 그런데 그 지루함이 교도소에서 20년을 보내는 한 남자의 시간과 닮아 있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3] 영화 중반, 앤디가 소장실을 점거하고 스피커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아리아를 튼다. 운동장의 수감자들이 일제히 멈춰 선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하늘을 본다. 그 몇 분간, 감옥 안의 모든 것이 정지한다. 이 장면을 두고 ‘예술이 영혼을 해방한다’는 식의 해석이 따라붙었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다르다. 중요한 건 그 음악을 튼 앤디가 아니라, 음악을 듣는 다른 죄수들의 표정이다. 그들은 모차르트가 누군지 모른다. 이탈리아어를 알아듣지도 못한다. 그런데 운다. 자신이 왜 우는지도 모른 채. 희망이란 게 있다면, 설명할 수 없는데도 마음이 움직이는 그 순간 자체가 희망이 아닐까. 밥 건튼이 연기한 위선적 소장이나 가학적 간수들은 다소 만화적으로 그려지고, 결말의 탈출 장치는 믿기 어려울 만큼 공교(工巧)롭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약점을 기꺼이 껴안는다. 진심이 뻔뻔하면 결점마저 덕목이 되는 법이다.
[4]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은 영화 내내 흐른다. 자칫 거추장스러워질 수 있는 장치였지만, 그의 목소리가 낭독이 아니라 고백처럼 들리기에 견딜 수 있다. “희망은 좋은 것이야. 어쩌면 최고의 것이지. 좋은 것은 사라지지 않아.” 영화의 마지막 대사다. 듣고 나면 민망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안 민망하다. 오히려 한동안 말을 잃는다. 냉소의 시대에 이런 대사를 정면으로 밀어붙이는 영화가 있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에겐 필요한 민망함인지도 모른다. 나 같은 삐딱한 인간이 이 영화 앞에서 무장해제된다는 사실이 조금 창피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