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규모(規模)가 곧 위대함인가 — 트로이
「트로이」 (Troy) · 볼프강 페터젠 (Wolfgang Petersen) · 2004
1억 7500만 달러. 배 천 척이 해변을 메우고, 수만의 군사가 평야를 가로지르며, 163분의 러닝타임 동안 고대 트로이의 성벽이 무너지는 데 투입된 금액이다. 볼프강 페터젠의 ‘트로이’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스케일은 언제 감동이 되고, 언제 공허가 되는가.
호머의 『일리아드』를 각색한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신들을 지웠다. 아테나도, 아폴론도, 아프로디테도 없다. 인간만 남았고, 인간의 탐욕과 명예욕, 사랑과 증오만이 전쟁을 끌고 간다. 십 년의 포위전을 수 주로 압축한 것도, 신화적 기괴함을 걷어낸 것도, 현대 관객에게 고대 서사시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타협(妥協)이다. 그런데 이 타협이 영화를 살렸는가, 죽였는가.
살린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브래드 피트의 아킬레우스는 육체의 조각이다. 첫 장면, 단신으로 거한을 쓰러뜨리는 순간 그가 신이 아닌 인간의 몸으로 신화적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영국 비평가 피터 브래드쇼는 이 ‘청동색 킬링 머신’이 영원한 영광을 말할 때 어딘가 현대적 아이러니가 섞여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다. 피트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전설이 육신을 넘어 살아남을 것을 아는 자의 피로를 얼굴에 담고 있다. 허영과 고독이 뒤섞인 그 표정이야말로 이 영화가 건진 것 중 하나다.
에릭 바나의 헥토르 역시 묵직하다. 고결(高潔)한 왕자의 비극은 아킬레우스와의 결투에서 정점을 찍는다. 싸움의 방식이 다르고, 철학이 다르며, 운명이 다른 두 남자가 맞붙는 장면은 이 영화가 캐릭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보여 준다. 반면 파리스와 헬레네는 참담하다. 열 해의 전쟁을 불러일으킨 사랑이라기엔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없다. 올랜도 블룸은 열정이 아니라 치기를 연기했고, 다이앤 크루거의 헬레네는 아름다운 수수께끼 이상이 되지 못한다.
영화의 정서적 무게중심은 피터 오툴이 연기한 프리아모스에게 쏠린다.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 적장의 막사를 찾아가는 노왕. 그가 아킬레우스의 손에 입을 맞추며 “내 아들을 내게 돌려달라”고 청하는 장면은 이 거대한 전쟁 서사극 전체에서 가장 작고, 가장 인간적이며, 가장 비장(悲壯)한 순간이다. 규모가 감동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감정이 규모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트로이’는 신화를 액션 영화로 번역한 작품이다. 번역 과정에서 원본의 시적 초월성 일부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인간적 규모의 드라마가 들어섰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명예란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페터젠은 이 물음들을 직접 던지지 않되 화면 안에 배치해 둔다. 관객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영화는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남기는 말로 끝을 향해 간다. “신들은 우리를 부러워한다. 신들은 죽지 않기 때문에 모든 순간이 무의미하다. 우리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