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밀실의 민주주의 — 12인의 성난 사람들
「12인의 성난 사람들」 (12 Angry Men) · 시드니 루멧 (Sidney Lumet) · 1957
법원 정면의 육중한 기둥들이 화면을 가른다. 카메라가 천천히 틸트다운하면 계단을 내려오는 군중이 보인다. 재판이 끝났다. 그러나 영화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배심원 열두 명이 좁은 방에 들어선다. 선풍기 하나가 돌아가지 않는다. 누군가 창문을 열지만 바람은 없다. 뉴욕의 여름은 무자비하다. 시드니 루멧의 데뷔작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이 방을 96분 동안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속았다. 법정 영화라길래 법정이 나올 줄 알았다. 피고인이라도 한 번 보여줄 줄 알았다. 그런데 없다. 살인 혐의를 받는 열여덟 살 청년은 단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건 오직 배심원들의 입을 통해 걸러진 정보뿐이다. 이게 의도적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영국의 한 영화 평론가이 영화가 “마음이 어떻게 바뀌는지—혹은 바뀌기를 거부하는지”를 다룬다고 썼다. 정확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덧붙이고 싶다. 이 영화는 우리가 얼마나 허술한 근거로 타인의 생사를 결정하는지 보여준다. 편견(偏見)과 안일(安逸)이 얼마나 쉽게 정의의 탈을 쓰는지도.
헨리 폰다가 연기하는 8번 배심원은 첫 투표에서 혼자 무죄를 외친다. 그가 특별히 증거를 더 알아서가 아니다. 단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다. 이 대사가 나올 때 나머지 열한 명의 표정을 보라. 짜증, 경멸, 무관심. 누구도 그 방에 더 있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야구 경기에 가야 하고, 누군가는 냉방이 되는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다. 그들에게 피고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일이다. 왜 굳이 되짚어야 하나.
루멧의 카메라는 이 압박을 시각적으로 번역한다. 영화 초반에는 눈높이에서 넓은 화각으로 방을 찍는다. 공간은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카메라는 점점 낮아진다. 렌즈는 길어지고, 얼굴들은 프레임 안에서 서로 부딪친다. 이 변화는 의식하기 어렵다. 그냥 갑갑해진다. 땀이 얼굴에서 흐르고, 목소리가 높아지고, 누군가는 테이블을 친다. 보리스 코프만의 흑백 촬영은 그 불쾌함을 한 톨도 숨기지 않는다.
리 J. 콥이 연기하는 3번 배심원은 마지막까지 유죄를 고집한다. 그의 분노는 피고인을 향한 게 아니다. 연락이 끊긴 자기 아들을 향한 것이다. 이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법정극에서 심리극으로 완전히 탈바꿈한다. 콥은 울음을 터뜨리며 “무죄”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나는 또 속았다. 카타르시스를 기대했는데, 남는 건 씁쓸함뿐이다. 정의가 실현된 건지 아닌지 우리는 끝까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957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오늘 불편한 이유는 명확하다. SNS에서 우리는 매일 배심원이 된다. 트윗 하나로 누군가를 유죄 판정한다.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중립충 취급을 받는다. 속도가 정의를 대체했다. 루멧의 배심원실은 그 속도에 대한 경고다. 물론 나도 그 속도에 익숙해진 사람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마감 시간을 계산하고 있다. 메타 시점을 취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8번과 3번이 법원 계단에서 스쳐 지나간다. 8번이 이름을 묻는다. “데이비스.” “맥카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눈다. 96분 동안 서로의 목을 조르다가 이제야 이름을 교환한다. 루멧은 여기서 컷을 끊고 그들이 군중 속으로 사라지게 둔다. 아무 음악도 없다. 승리도, 패배도, 확신도 없다. 그냥 빗속으로 걸어가는 두 남자.
“그건 언제나 누군가의 아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