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카메론은 왜 나비족끼리 싸우게 만들었나 — 아바타: 파이어 앤 애쉬

「아바타: 파이어 앤 애쉬」 (Avatar: Fire and Ash) · 제임스 카메론 (James Cameron) · 2025

아바타: 파이어 앤 애쉬 (2025) 이미지
「아바타: 파이어 앤 애쉬」 (2025) 이미지 © TMDb

검은 재가 눈처럼 내린다. 화면 전체를 뒤덮는 회색 미립자 사이로, 식어가는 용암 위를 나비족이 달린다. 푸른 피부 위로 반사되는 건 생체발광의 영롱한 빛이 아니라 마그마의 붉은 열기다. 《아바타: 파이어 앤 애쉬》는 그렇게 시작된다. 우리가 알던 판도라가 아니다. 관객은 영화 개시 10분 만에 깨닫는다. 이번에는 인간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또 속았다.

1편에서 RDA가 홈트리를 불태울 때, 나는 제임스 카메론의 의도를 뻔히 읽었다고 생각했다. 식민주의 비판, 생태주의 경고, 원주민의 고귀함. 2편에서 바다로 무대를 옮겼을 때도 구도는 유지됐다. 약탈자와 수호자. 그런데 3편이 내민 적은 재의 부족(Ash People), 같은 나비족이다. 판도라 북부 화산지대에서 정복과 팽창을 일삼는 자들. 그들의 지도자 바랑은 RDA의 어떤 대령보다 설득력 있게 공포를 전달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외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이와를 믿되, 돌봄의 어머니가 아니라 파괴의 힘으로 해석하는 자들. 카메론은 프랜차이즈의 뼈대를 스스로 부숴버렸다.

이건 위험한 선택이다. 1, 2편이 쌓아온 ‘고귀한 야만인’ 낭만주의를 정면으로 배반하기 때문이다. 재의 부족은 인간 없이도 제국주의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폭력과 부족주의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편적 조건일 수 있다고. 어떤 관객은 이걸 메시지의 확장으로 읽겠지만, 다른 관객은 배신으로 읽을 것이다. 카메론은 그 위험을 알면서도 밀어붙였다.

《버라이어티》의 피터 드브루지는 이 선택을 “도발적”이라 평가했다. 나는 그 단어에 반쯤 동의한다. 도발이라기보다는 필연에 가깝다. 5부작을 약속한 프랜차이즈가 세 번째 편에서도 같은 악당 구도를 반복했다면 그건 게으름이다. 카메론의 선택은 게으르지 않았다. 다만, 그 선택이 감정적으로 착지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3시간 12분. 이 숫자 앞에서 나는 두 번째로 속았다고 느꼈다. 중반부는 나비족 씨족 간의 외교 협상에 상당 시간을 할애한다. 정치적으로 필요한 장면이다. 그러나 카메론 최고의 작품들이 보여주던 추진력은 여기서 멈춘다. 회의와 회의 사이, 나는 화장실을 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3편 중 가장 야심찬 편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가장 조밀한 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마지막 한 시간은 카메론이 왜 여전히 현역인지 상기시킨다. 용암이 흘러내리는 지형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 가족 드라마와 대규모 전쟁이 교차 편집되는 시퀀스. 샘 워싱턴은 10년 넘게 전쟁터에 있었던 남자의 탈진을 연기하고, 조 샐다나는 퍼포먼스 캡처만으로 복수심에 불타다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여자를 표현한다. 네이티리의 분노가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다음 편으로 넘긴다. 또 기다리라는 소리다.

여기서 나는 카메론의 판도라보다 2024년의 지구를 더 많이 본다. 외부의 적이 사라진 뒤에도 끝나지 않는 내전. 같은 언어를 쓰는 자들끼리의 정복. 트라우마가 정의를 잠식하고, 방어가 공격으로 변질되는 과정. 재의 부족은 나비족의 어두운 거울이고, 제이크 설리가 된 것을 두려워하는 건 그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이다. 카메론이 원하는 질문은 단순하다. 얼마나 싸워야 적과 닮지 않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았다면 나도 이 글 대신 SF 웹소설 마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세 시간 동안 앉아서 가장 비싼 다큐멘터리를 봤다. 그리고 두 편 남았다는 사실에 탄식했다. 속는 셈 치고 또 볼 거다. 익숙한 패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