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검투장의 질문, 광장의 대답 — 글래디에이터
「글래디에이터」 (Gladiator) · 리들리 스콧 (Ridley Scott) · 2000
피를 원하는 관객석
“Are you not entertained(즐겁지 않으냐)?” 피 묻은 검을 든 검투사가 콜로세움의 관중을 향해 포효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0년 작 ‘글래디에이터’ 속 이 장면을 두고 영국 영국의 한 영화 평론가는 ‘불편한 자기 반영’이라 지적했다. 로마인들의 피에 대한 갈증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정교하게 연출된 살육으로 관객을 열광시키는 이 영화 자체가 고대 검투 경기와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날카로운 비평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의 위선이 아니라 솔직함에 주목한다.
작은 바람, 큰 남자
러셀 크로가 연기한 막시무스는 로마 최고 장군에서 노예 검투사로 추락한 남자다. 복수극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이 사내가 휘두르는 칼끝에는 거창한 대의(大義)가 없다. 그가 원하는 건 단순하다. “내 집은 언덕 위 작은 집입니다. 흙은 아내 머릿결처럼 검고, 아들은 조랑말과 뛰어놉니다.” 제국을 호령하던 장군의 소원이 고작 가족의 품이라니. 《뉴욕타임스》의 엘비스 미첼은 크로가 “쓰러진 가족에게 저세상에서 만나자 속삭이는 순간”의 정서적 울림을 짚었다. 맞다. 관객은 ‘인류애’를 외치는 작은 남자보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큰 남자에게 더 절절하게 공감하는 법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코모두스 황제는 그 대척점(對蹠點)에 선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상처, 누이에 대한 뒤틀린 집착, 권좌에 대한 강박. 피닉스는 단순한 폭군이 아니라 병적으로 불안한 어린아이를 연기한다. 권력을 쥔 자의 광기가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통찰. 2천 년 전 로마나 지금 이 땅이나 다를 바 없다.
스펙터클의 양면
리들리 스콧은 분명 이야기꾼보다 분위기 장인에 가깝다. 탈색된 색감, 먼지 속 금빛 역광(逆光), 거의 잠재의식 수준으로 빠른 편집. 그의 로마는 고증(考證)이 아니라 신화다. 원로원의 음모와 궁정 암투는 다음 격투 장면을 위한 들러리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한스 짐머의 묵직한 타악과 비가(悲歌) 같은 선율이 대사의 공백을 메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단순한 오락에 그치지 않는 건, 막시무스의 마지막 질문 때문이다. 피투성이로 죽어가며 그가 남긴 말. “로마의 꿈이 실현될 겁니다.” 개인의 복수가 체제의 회복으로 승화되는 순간, 검투사의 죽음은 순교가 된다.
광장에 던지는 질문
콜로세움은 권력이 대중에게 피와 환호를 교환하던 장소였다. 선동(煽動)과 광기(狂氣)의 아레나. 군중은 언제나 엄지를 치켜올릴지 내릴지 결정하는 심판관이었고, 동시에 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흥분하는 조종 가능한 존재이기도 했다. 스콧은 그 콜로세움을 스크린 위에 복원해놓고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로마 군중과 다르냐고.
촛불과 태극기가 교대로 광장을 메우고, SNS의 알고리즘이 분노를 먹고 자라는 지금.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피를 원한다. 정치적 반대편의 몰락을, 지지하는 편의 승리를. “즐겁지 않으냐”는 검투사의 외침은 2천 년을 건너 이 땅의 광장에 정확히 꽂힌다. 문제는 간단하다. 우리는 엄지를 올리고 있는가, 내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 엄지가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는지조차 모른 채 환호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