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반딧불이의 묘: 속죄의 기록, 애니메이션의 한계

「반딧불이의 묘」 (火垂るの墓) · 타카하타 이사오 (Isao Takahata) · 1988

반딧불이의 묘 (1988) 이미지
「반딧불이의 묘」 (1988) 이미지 © TMDb

노사카 아키유키는 여동생을 굶겨 죽였다

소설가 노사카 아키유키는 1945년 열네 살이었다. 그해 고베 대공습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친척집을 전전했다. 여동생은 영양실조로 죽었다. 20여 년 뒤 그는 이 체험을 소설로 썼다. 『반딧불이의 묘』는 반성문이자 자백서였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1988년 이 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원작자의 죄책감을 고스란히 보존했다. 같은 해 같은 날,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와 동시 상영됐다. 의도적 잔혹함 같은 편성이다.

영화는 결말에서 시작한다

고베역 대합실, 부랑자가 된 소년이 쓰러져 있다. 사람들은 시체를 밟고 지나간다. 타카하타는 주인공 세이타의 죽음을 첫 시퀀스로 배치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를 추적하는 회고 구조다. 데릭 말콤은 가디언에 “애니메이션이 현실 도피가 아닌 현실 직면의 수단으로 쓰인 적이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정확한 질문이다.

세츠코의 발이 질질 끌린다

네 살 여동생 세츠코가 이 영화의 핵심이다. 타카하타는 아이의 특이한 행동을 정밀묘사한다. 피곤하면 발을 끌고, 사탕 깡통을 꼭 쥐고, 이해 불가능한 상황을 혼란스러운 신뢰로 받아들인다. 몸이 마르는 과정은 임상기록처럼 그려진다. 실사로는 불가능하다. 아역 배우에게 굶주림을 연기시킬 수는 없다.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잔혹함(殘酷)이 여기 있다.

이모는 악인이 아니다

토니 레인스는 사이트 앤드 사운드에서 “영화가 아이들을 국가적 순수나 피해의 상징으로 위치시키지 않는다”고 썼다. 정확하다. 세이타와 세츠코는 상징이 아닌 두 인간일 뿐이다. 이모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악녀가 아니라 지친 사람이다. 쌀을 배급하듯 동정심도 배급한다. 이 모호함이 비극을 더 날카롭게 만든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봤고 매번 다른 곳에서 울었다. 비평의 어려움은 분석의 한계가 아니라 감정의 과잉 때문이다.

잊힌 아이들

전쟁영화는 대개 희생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이 영화는 무의미를 고집한다. 영웅적으로 죽은 게 아니라 그저 죽었다. 돌볼 여력이 없던 사회에 잊힌 아이들. 지금도 어딘가에서 아이들이 굶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도 우리는 밥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