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늙어간다는 것, 혹은 날아오른다는 것 — 하울의 움직이는 성

「하울의 움직이는 성」 (ハウルの動く城) ·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 2004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 이미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 이미지 © TMDb

언덕 너머의 기계

구름이 낮게 깔린 유럽풍 마을. 언덕 너머로 연기를 뿜으며 걸어오는 것은 분명 ‘건물’인데, 다리가 있다. 굴뚝과 포탑과 발코니가 뒤엉킨 철제 구조물이 삐걱거리며 평원을 가로지른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이 불가능한 건축물의 실루엣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영국 영국의 한 영화 평론가이 성을 두고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촉각적인 판타지”라 썼는데, 과언이 아니다. 천과 불꽃과 늙어가는 피부의 질감이 모두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저주인가, 해방인가

열여덟 소녀 소피는 황야의 마녀에게 저주를 받아 하룻밤 새 구십 노파가 된다. 서사의 출발점인 이 설정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늙음이란 과연 상실일 뿐인가. 미야자키는 역설적으로 대답한다. 은발의 소피는 오히려 당당해진다. 젊은 시절 품었던 자기 비하와 소심함이 ‘늙은 몸’이라는 위장 아래서 비로소 걷힌다. 視覺(시각)과 敍事(서사)가 맞물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소피의 외양은 장면마다 흔들린다. 청춘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늙고, 때로는 그 중간 어딘가에 머문다. 겉모습의 동요가 내면 상태를 투사한다는 장치를 미야자키는 대사 없이 구현한다.

폭격기 떼, 혹은 검은 새들

영화 중반부터 전쟁이 끼어든다. 폭격기 편대가 하늘을 뒤덮고, 도시는 불바다가 된다. 미야자키가 이라크 전쟁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분노가 화면에 직접 옮겨졌다. 양쪽 왕국 모두 의미 없는 살육을 벌이고, 마법사와 마녀들은 대량 살상 무기로 동원된다. 하울이 징집을 거부하는 행위는 양심적 병역 거부의 은유로 읽힌다. 反戰(반전)과 浪漫(낭만)이라는 두 축이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한다. 이 공존이 어색하다고 느끼는 관객도 있다. 동화적 사랑 이야기와 정치적 분노가 서로 다른 박자로 흐르기 때문이다. 《버라이어티》의 비평이 지적한 대로, 반전 메시지는 동화 골격 위에 덧붙여진 듯 보일 때가 있다.

설명 없는 결말

마지막 30분은 속도가 빨라진다. 하울이 불 악마 캘시퍼와 맺은 계약의 정체, 황야의 마녀의 변심, 전쟁의 종결—모두 급하게 봉합된다. 논리보다 감정을 택한 결말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지녔던 구조적 완결성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미야자키의 우선순위는 분명해 보인다. 老化(노화)와 自我(자아)에 관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대신, 사랑의 마법으로 갈등을 해소한다. 설명은 부족해도 감정은 차오른다.

불완전한 걸작

이 영화에 별점을 매기라면 아마 망설일 것이다. 서사적 허점은 분명하고, 정치적 메시지와 로맨스 사이의 불협화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히사이시 조의 왈츠가 흐르는 비행 장면 앞에서 비평적 결함 목록은 무력해진다. 나는 결국 이 영화의 불균형을 좋아한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비평가로서는 실격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