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세 남자의 얼굴, 혹은 도덕의 해체 — 석양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Il buono, il brutto, il cattivo) · 세르조 레오네 (Sergio Leone) · 1966
론코코로네의 방
세르조 레오네의 촬영장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다림에 썼다고 전해진다. 레오네는 한 장면을 수십 번 리허설했고, 그사이 이스트우드는 가만히 서서 시가를 피우거나 먼 산을 바라봤다. 그 지루한 기다림의 리듬이 고스란히 필름에 배어들었다. ‘석양의 무법자’에서 이스트우드가 보여주는 느릿한 움직임, 극도로 절제된 대사, 그리고 눈동자 하나로 상황을 지배하는 연기는 그 무수한 대기의 시간들이 낳은 결과다. 레오네는 배우를 연기하게 하기보다 존재하게 만들었다.
눈과 손의 문법
레오네가 확립한 서부극의 새로운 문법은 한마디로 ‘확대’다. 인물의 눈, 손, 권총집이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극단적 클로즈업은 이 영화에서 거의 집착에 가까운 수준으로 반복된다. 평론가 필립 스트릭은 영국의 한 영화지에 이 영화가 “존 포드 이래 서부극이 본 가장 중요한 양식적 혁신”이라고 썼다. 사실 그 말에 동의하든 말든, 레오네의 화법이 이후 액션영화 전반의 시각 언어를 바꿔놓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휘파람, 전기기타, 합창, 그리고 총성까지 악기처럼 배치한 그의 스코어는 기존 서부극 음악의 관습을 완전히 무시한다. 유명한 세 음표 주제가 일종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음악은 침묵을 대신하고,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좋은 자는 없다
영화의 이탈리아 원제 ‘Il buono, il brutto, il cattivo’는 ‘좋은 자, 나쁜 자, 추한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레오네는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를 명확히 정하지 않는다. 이스트우드가 맡은 ‘좋은 자’ 블론디는 동료를 여러 차례 배신하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엘리 월러크의 투코는 수배범이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리 밴 클리프의 엔젤 아이즈는 단지 자신의 본성에 더 솔직할 뿐이다.
월러크의 연기는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 브로드웨이 출신의 정통 연기파 배우가 멕시코 산적을 연기하면서 과잉과 절제 사이를 줄타기한다. 형인 신부와 재회하는 장면에서 그가 보여주는 감정의 깊이는 각본이 제시하는 것 이상이다. 그 짧은 시퀀스만으로 투코라는 인물은 단순한 만화적 악당의 영역을 벗어난다.
전쟁이라는 배경
남북전쟁은 이 영화에서 역사적 맥락이 아니라 일종의 종말론적 무대장치로 기능한다. 전쟁의 처참함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다리 전투 시퀀스다. 수백 명의 병사가 전략적으로 무가치한 다리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죽어간다. 세 주인공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황금을 찾는 일에만 몰두한다.
레오네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직화된 폭력의 부조리함 앞에서 개인의 탐욕은 차라리 정직해 보이기까지 한다.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죽음을 면한 자들은 어차피 또 무언가를 탐하게 된다. 그것이 영광이든 금화든.
묘지에서의 대결
영화의 정점은 원형 묘지에서 벌어지는 세 사람의 결투다. 대사는 거의 없다. 레오네는 눈동자와 손, 그림자의 움직임만으로 수 분에 걸친 긴장을 쌓아간다. 모리코네의 음악은 점점 고조되고, 편집은 극도로 짧은 숏들을 연결하며 심장 박동처럼 가속한다.
어떤 이들은 이 장면을 순수한 영화적 달성이라 부르고, 어떤 이들은 자기과시적 형식주의라고 비판한다. 분명한 것은 이 클라이맥스가 영화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패러디된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 사람이 본 미국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별명은 애초에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유럽인이 미국의 신화를 다룬다니, 그것도 스페인 사막에서 촬영하면서. 그러나 레오네는 그 외부자의 시선을 무기로 삼았다. 존 포드가 서부에서 미국의 가치를 발견했다면, 레오네는 문명의 규칙이 사라진 곳에서 인간의 민낯을 드러냈다.
세 시간에 가까운 상영 시간, 의도적으로 늘어지는 페이스, 도덕적 판단의 유보. 이 모든 것이 당시 관객들에게는 낯설었고 비평가들에게는 당혹스러웠다. 지금은 고전이 된 작품도 출발점에서는 대개 그렇다.
레오네가 이 영화로 던진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다. 선악의 구분은 언제나 가능한가. 상황이 극한으로 치달을 때 우리는 과연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 도덕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저 생존의 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