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극장이 불타기 전에 —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Inglourious Basterds) · 쿠엔틴 타란티노 (Quentin Tarantino)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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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발츠는 2009년 칸에서 남우주연상을 받기 전까지 오스트리아 TV 배우였다. 독일어권 밖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타란티노는 캐스팅 과정에서 수백 명의 배우를 만났고, 그때마다 똑같은 절망을 느꼈다고 한다. 대사가 요구하는 언어적 유희—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악역—를 소화할 배우가 없었다. 발츠를 만난 날, 타란티노는 “신이 내 영화를 구하러 천사를 보냈다”고 말했다. 과장이 아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한스 란다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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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구조부터 이상하다. 챕터로 나뉜 153분. 액션 영화를 기대한 관객은 처음 20분을 견디기 어렵다. SS 장교 란다가 프랑스 농가에서 낙농업자를 심문하는 장면. 폭력은 없다. 총성도 없다. 대화만 있다. 그런데 이 대화가 견딜 수 없이 무섭다. 란다는 우유를 마시고, 파이프 담배를 권하고, 농부의 딸들을 칭찬한다. 예의 바르고 친절하다. 바닥 밑에 숨어 있는 유대인 가족의 존재를 농부도 알고 란다도 안다. 관객도 안다. 그 앎의 무게가 장면을 짓누른다. 타란티노는 언어만으로 서스펜스를 만드는 감독이다. 칼로 머리 가죽을 벗기는 장면보다 이 대화가 더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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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은 역사를 다시 쓴다. 유대인 여성 쇼샤나가 운영하는 파리의 극장에서 나치 지도부가 몰살당한다. 질산염 필름이 불타고, 스크린에는 쇼샤나의 얼굴이 뜬다. “유대인의 얼굴이다”라고 그녀가 말한다. 나치 장교들은 선전 영화를 보며 박수치다가 죽는다. 영화를 보다가 영화에 의해 죽는 것이다. 타란티노는 여기서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극장 안에서 환호하던 나치 관객과 지금 스크린 앞에서 그들이 불타는 걸 즐기는 우리는 뭐가 다른가? 영국의 한 영화 평론가이 영화가 “순수하지 않은 영화”라고 썼다. 이론적으로 진지하면서 쾌락적으로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나는 그게 칭찬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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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티노의 대체역사는 판타지다. 유대인 복수극이라는 판타지. 영화가 세상을 바꾼다는 판타지. 하지만 판타지에도 무게가 있다. 멜라니 로랑이 연기하는 쇼샤나는 가족을 잃은 생존자다. 그녀의 분노는 조용하다. 브래드 피트의 과장된 테네시 억양과 바스터즈의 광대극 사이에서, 쇼샤나만이 진짜 감정을 가진 인간처럼 보인다. 그녀가 거울 앞에서 붉은 립스틱을 바르는 장면은 전쟁영화의 클리셰가 아니라 복수극의 의식이다. 역사는 이렇게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끝날 수 있다. 그게 영화의 특권이자 한계다. 극장이 불타기 전, 스크린 위의 얼굴들은 영원히 웃고 있다.